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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계첩 및 함’국보 지정

기사입력 2020.12.2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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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왕실 하사품이 완전하게 갖춰진 채 300년 넘게 풍산홍씨 후손가에 전래된「기사계첩 및 함」을 국보로 지정하고 보물로 지정 하였다.

     

    국보 제334호 「기사계첩 및 함(耆社契帖 및 函)」은 1719년(숙종 45년) 59세가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선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해 제작한 계첩(契帖)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궁중회화다.


    * 계첩(契帖):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이 계를 조직해 만든 화첩으로, 보통 참석한 인원수대로 제작해 나눠 갖는 것이 풍습이었음. 오늘날 기념사진과 유사한 기능

    * 기로소(耆老所):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文官)들을 우대하던 기관. 1719년 당시 숙종은 59세였기 때문에 기로소에 들어갈 나이가 되지 않았으나, 태조 이성계가 70세 되기 전 60세에 들어간 예에 따라 입소(入所)한 것임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되었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년)에 완성되었다. ‘기사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눠줄 11첩과 기로소에 보관할 1첩을 포함해 총 12첩이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박물관과 개인 소장 5건 정도가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2017년도부터 실시한 보물 가치 재평가 작업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의 기사계첩이 2019년 국보 제32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번 건이 두 번째 국보 지정이다.

     

    이번에 지정된「기사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任埅, 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과 경희궁 경현당(景賢堂)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대제학 김유(金楺, 1653∼1719)의 발문, 각 행사의 참여자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초상화, 축시(祝詩),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다른 ‘기사계첩’과 구성이 유사하다.

     

    * 계첩에 수록된 행사그림 순서
    ①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 경희궁 흥정당에서 기로소에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
    ②숭정전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이튿날인 2월 12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
    ③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4월 18일 경현당에서 왕이 기로신들에게 베푼 연회 광경
    ④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기로신들이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배(銀盃)를 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행렬
    ⑤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기로신들이 기로소에서 연회를 행하는 모습

     

    그러나 다른 사례에서는 볼 수 없는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수록되어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 중의 한 명이었던 홍만조(洪萬朝, 1645~1725)에게 하사되어 풍산홍씨 후손가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경위와 내력을 말해 준다.

     

    * 홍만조: 조선 숙종 때 학자이자 관료. 호는 만퇴(晩退). 시호는 정익(貞翼). 본관 풍산(豊山). 1678년(숙종 4)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93년 강화유수, 동왕 2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형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쳤음. 청렴하고 도량이 넓었다 하며, 묘소는 서산인 아산시 배방읍에 있음

     

    이 계첩은 300년이 넘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내함(內函), 호갑(護匣, 싸개), 외궤(外櫃)로 이루어진 삼중(三重)의 보호장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첩을 먼저 내함에 넣고 호갑을 두른 후, 외궤에 넣는 방식으로, 조선 왕실에서 민가에 내려준 물품의 차림새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왕실 하사품으로서 일괄로 갖추어진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제작수준도 높아 화첩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며, ▲기로신들의 친필(親筆) 글씨와 더불어 그림이 높은 완성도와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어 현존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도 갖추었다. 아울러 계첩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함(내함, 호갑, 외궤) 역시 당시 왕실공예품 제작 기술에 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므로 함께 국보로 함께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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