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제암리 대학살, 그 순교의 현장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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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제암리 대학살, 그 순교의 현장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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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화성 제암교회 순교 유적지는 3.1운동 이후 일제가 저지른 양민 학살사건 현장이며, 순교의 현장이다.

 

화성지역 3.1운동이 과격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일제의 행정기구인 면사무소, 경찰관주재소, 우편국과 일본인 가옥들이 파괴되고, 일본인 순사 2명이 처단되었다. 일제는 화성지역의 강렬하고 거센 3.1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특별검거반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소재하는 제암리 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 권사가 1905년 8월 5일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다. 제암리 마을은 씨족 중심 농촌 마을로, 3. 1운동 당시 총 33가구 중 2가구를 제외한 31가구가 순홍 안 씨로, 안 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은 제암리 학살사건이 있은 지 6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4km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안장되었던 유해를 발굴해 제암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유택을 마련했다. 후세에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전시관, 교육관 조형물 등을 설치하여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의 배경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가던 당시 제암리 교회 교인들과 주민들은 장날이었던 3월 31일에 발안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위협사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도자를 체포했다.

 

격분한 시위 군중은 일본인 가옥과 학교를 파손하고, 이튿날부터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 시위를 이어간다. 4월 3일에는 수촌리 주민들이 주동이 되어 우정면과 장안면 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사건의 진행

일제는 1, 2차에 거쳐 수촌, 화수리를 습격해 마을을 불태우고 지도자들을 잡아들였다. 당시에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일본 육군 제79보병연대 소속의 중위 아리타 외 11명의 보병이 4월 13일에 발안 지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제암리의 지도자들이 아직 잡히지 않았음을 알았고 제암리를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4월 15일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던 사사카, 순사보 조희창, 일본인 순사 1명을 대동하고 제암리로 이동했다. 이들은 병력을 나눠 주민들의 퇴로를 봉쇄했고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게 했다.

 

명단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들까지 불러 모았고 아리타 중위가 교회에 들어갔다 나오자마자 교회를 포위하고 있던 보병들이 일제히 사격했으며 이후에는 석유를 이용해 불을 질렀다. 제암리에서 23명 살해되었다. 또한, 당시 바람이 많이 불어 교회 아랫집들은 불이 옮겨붙었으며 불이 붙지 않은 윗집까지 일일이 태우고 다녔다.


사건 후 일본의 반응

일본은 무장한 폭도들의 저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포하였고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다. 재한 일본인들의 생각 역시 다를 게 없어서 이는 조선인들의 독립이라는 망상이 원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에 의해 진실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일제는 당혹스러워했지만 지속적으로 정당방위를 강조했다.


세계의 여론이 악화되자 복구비를 내놓고 조선 총독이 현장을 방문하였다. 또 주범 육군 중위 아리타를 군법 재판에 회부하였다. 하지만 이는 악화된 여론을 달래기 위한 기만책이었고 여론이 잠잠해지자 아리타 중위는 나중에 무죄 방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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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박사 동상.

 

서구의 반응

4월 6일에 일어났던 수촌리 방화에 대한 소식을 듣고 4월 16일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이동하던 선교사 스코필드, 커티스, 언더우드 등의 귀에 이 비극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들은 제암리로 가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뒤 본국의 교회에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때문에 일제는 곤혹스럽게 된다.

 

선교사들은 본래 정치적인 중립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3.1 운동 당시 비무장인에 대한 폭력적인 행태를 보고는 마음을 바꾸었고 적극적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해 각국 영사관에 항의와 요청을 하였다. 이들의 요청 때문에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에서는 파악에 나섰다. 이들은 수촌리와 제암리 사건 현장으로 안내해 실상을 알렸고 본국으로 이를 알려 진실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국제적인 여론이 일제에 불리하게 돌아가도록 했다. 이중 주목할 만한 사람은 프랭크 스코필드다. 그는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로 일제의 만행을 지속적으로 언론에 투고했으며 이 때문에 미움을 사서 귀국하게 된다.

 

스코필드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스코필드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스코필드는 일본 헌병 몰래 현장 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내 일제의 야만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뉴욕 타임스의 1919년 4월 17일 자 기사는 임시정부인 ‘한성 정부 수립’ 소식을 알렸고 한국인의 만세 시위를 ‘평화 시위’, ‘평화 혁명’이라 불렀다. 4월 24일 자 기사에서는 “일본군은 서울 동남방 45마일의 촌락에서 남성 기독교인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총살하고 대검으로 찔러 무참히 죽였다. 일본군은 만행 후 그 마을의 교회와 그 밖의 건물들을 불태워 없앴다.”라고 보도했다.

 

제암리 교회당

1969년에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사죄의 의미로 제암리 교회당을 재건하였는데, 일본 기독교인들은 이미 사건 직후부터 현장을 찾아 전모를 확인하고 일본 내 기독교 신문에 고발기사나 추도시를 실었다. 이 교회당은 3.1운동 순국기념관을 지으면서 헐렸고 지금은 그 옆에 제암리 교회가 건립되어 있다.

 

화성지역 3.1운동 의의

백 년 전 3.1운동과 화성 전역을 울리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세상을 바꾸는 불씨가 되었다. 화성 3.1운동의 저항과 독립,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향한 불굴의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위대한 자산이 되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수많은 독립운동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의 국가관을 잘 설명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순교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는 기억하고 본받아 평화와 자유를 위한 헌신의 발판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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