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이주민 롤모델 언더우드 서거 100년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문화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이주민 롤모델 언더우드 서거 100년

14755377025240.jpg새문안교회의 첫 예배당이자 언더우드 선교사 사택으로 쓰인 정동 사랑채. [새문안교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부활절이던 1885년 4월 5일, 일본을 떠나 제물포항에 들어온 한 상선에서 벽안의 두 청년이 내렸다. 미국의 북장로회가 파견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元杜尤)와 미국 감리회 소속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였다. 당시 각각 27세와 26세로 연부역강하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열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해 선교의 씨앗을 심는 한편 근대적 교육기관의 효시를 세워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두 사람이 우리나라를 찾은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 피에르 모방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보다 4년 앞선 1832년, 네덜란드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가 중국 연안에서 풍랑을 만나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에 정박했다가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눠줬다. 1866년에는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들어왔다가 주민과 갈등을 빚어 선원들과 함께 숨졌다. 1884년에는 평신도 의료선교사인 호러스 알렌이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으로 파견돼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왕실 의사가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목적을 띠고 입국한 뒤 신도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운 개신교 목회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처음이었다. 출발은 언더우드가 빨랐다. 미혼인 언더우드는 방한 이틀 뒤 서울에 입성했고, 임신 중인 아내를 데리고 온 아펜젤러는 서울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5월 3일 다시 제물포로 입항했다.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돕다가 정동의 가옥 한 채를 빌려 고아들을 가르쳤다. 이듬해 5월 11일 언더우드학당(구세학당)을 개교했고 1905년 경신학교로 개명했다. 1915년에는 조선기독대를 설립했는데,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받은 뒤 해방 후 연희대를 거쳐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와 합쳐져 오늘의 연세대가 됐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3일 2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교육사업에 나섰다. 고종은 이듬해 6월 8일 '인재를 기른다'는 뜻의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하며 격려했다. 1885년 5월 3일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메리 스크랜턴은 이듬해 최초의 여성 근대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고,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빈민 의료 봉사와 선교에 나섰다.

14755377062129.jpg
언더우드(원두우) 선교사의 손자인 원일한 교수에게 1973년 9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해 국민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교회를 세운 것도 언더우드가 먼저였다. 1886년 7월 11일 자신의 두 번째 조선어 선생인 노춘경에게 첫 세례를 준 데 이어 1887년 9월 27일 정동의 자기 집 사랑방에서 14명의 교인과 함께 첫 예배를 올렸다.
 
한국장로회와 새문안교회는 이날을 뿌리로 삼고 있다. 언더우드보다 앞선 1886년 4월 25일 부활절에 주한 일본대사관 직원에게 첫 세례를 준 아펜젤러도 정동의 조그만 집 한 채를 사들여 '벧엘예배당'으로 꾸민 뒤 1887년 10월 9일 첫 예배를 보았다. 한국감리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다. 오늘날 장로교와 감리교는 한국 개신교의 80%를 넘는 교세를 자랑한다.

언더우드는 한국어소사전과 찬송가 등을 펴냈고 아펜젤러,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한글 성경을 보급했다. 이 모임에서 '여호와'를 '상제'로 번역할지 '하나님'으로 옮길지, 'eye of needle'을 '바늘귀'로 할지 '바늘눈'으로 쓸지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빵'은 당시 조선에 없었던 탓에 결국 '떡'으로 표현하기로 결정됐다.


기독교청년회(YMCA) 설립에도 앞장선 1903년 언더우드는 초대 회장을 맡아 청년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한편 야구·농구·체조 등의 서양 근대 스포츠 보급에 나섰다. 1889년에는 명성황후의 시의로 일하던 제중원의 여의사 릴리어스 호턴과 결혼해 외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를 낳았다. 언더우드는 건강이 악화해 1916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0월 12일 그곳에서 소천했다. 뉴저지 교회묘지에 묻혔다가 유족의 뜻에 따라 1999년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로 이장했다.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하려고 배를 탔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마주 오는 배와 충돌해 익사했다.

14755377097873.jpg
언더우드 가문의 3대, 4대, 5대 후손들이 2012년 6월 서울 신촌의 연세대를 방문해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연세대 제공]

아펜젤러의 아들딸도 일제의 탄압 속에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발전시키는 데 헌신해 귀감이 됐지만 4대에 걸친 언더우드 일가의 한국 사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원한경은 3·1운동 때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등을 세계 교회와 언론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아들 원일한과 투옥됐다가 1942년 강제 추방됐다. 원한경은 광복 후 미국 육군성 통역요원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으나 부인 와그너가 좌익청년들에게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6·25가 터지자 민간 고문단으로 활약하다가 1951년 2월 부산에서 숨졌다. 장남 원일한은 연희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미국 해군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고 유엔군 정전협상 수석통역장교를 맡았다. 3남 원재한과 4남 원득한도 각각 미군 군목과 통역요원으로 참전했다. 언더우드의 증손자 원한광은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4년 11월 한국을 떠났고, 원한석은 한국에서 경영컨설턴트로 일하며 '퍼스트 무버' 등의 저서를 펴냈다.


19세기 말 개화기에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서양인 가운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처럼 불꽃 같은 삶을 살며 헌신한 인물은 드물다. 더욱이 언더우드 가문처럼 100여 년간 누대를 이어오며 기독교정신에 입각해 봉사를 실천한 집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주민 가족의 롤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는 12일은 언더우드가 세상을 떠난 지 꼬박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는 개신교단들은 힘을 합쳐 전도에 나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에큐메니컬(교회 일치주의) 운동을 본받고, 학교를 사리사욕에 이용한다고 손가락질받는 몇몇 사학 설립자 집안들은 신교육의 요람을 만든 선교사들에게 육영사업의 참뜻을 배우며, 외국 국적을 병역 기피와 탈세에 이용하는 일부 부유층·권력층 인사들은 언더우드 일가를 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되새길 일이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