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주목받는 '전주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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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주목받는 '전주비빔밥'

14999280268743.jpg 오색오미 음식에 담긴 상생·협치의 미덕


오색오미(五色五味)의 전통음식인 비빔밥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그 대표주자는 양반 고을이자 미식 1번지인 전주의 비빔밥.


전주 하면 비빔밥, 비빔밥 하면 전주가 자연스레 떠오를 만큼 이곳의 상징적 음식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비빔밥의 고장에서 그 멋과 맛을 새롭게 느껴본다.

14999280305643.jpg 전주전통비빔밥 [사진/임귀주 기자]

 

부드러운 곡선미의 황금색 유기그릇. 모난 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원만한 놋그릇 안의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멋스러운 맛의 향연이랄까. 보기에 따라 무슨 설치예술작품 같기도 하다.


황포묵, 콩나물, 쑥갓, 시금치, 표고버섯, 참깨…. 각양각색의 식재료들이 그릇 안에 모여 서로 손잡고 강강술래라도 추는 듯하다. 정중앙에 보란듯이 올려진 붉은색의 육회. 그 위에는 노란 은행과 연노랑의 잣이 세 개씩 앙증맞다 싶을 만큼 귀엽고 깜찍하게 놓였다. 이들 재료 아래로는 밥과 콩나물이 숨은 듯 깔려 있다.


"아주 멋져요! 알록달록한 재료들이 참 잘 어울리네요! 맛이요? 매콤한 듯하면서도 순하다고 할까요, 아니면 부드러우면서도 감미롭다고 할까요? 아무튼 대만족입니다!"

   

일가족 4명이 전주 구경을 왔다는 김영희(57·경북 구미) 씨. 한 식당에서 비빔밥의 진미에 푹 빠진 김 씨는 "처음 방문한 전주인데 비빔밥 하나로 본전을 뽑고도 남는다"며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 궁중음식이 서민음식으로

한국인의 대표 음식 비빔밥이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 한 계기는 취임 직후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였다.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의 첫 오찬자리가 마련된 지난 5월 19일 청와대 상춘재. 원탁에 둘러앉아 진행된 이날 오찬에는 주요리로 비빔밥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통합을 의미하는 비빔밥에서 소통과 협치의 국·청(국회·청와대) 관계를 정립하겠다는 의중이 담긴 것으로 읽혔다.


문 대통령은 하루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뒤 한 서민식당에서 일행들과 8천원짜리 비빔밥 점심을 먹어 화합과 상생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비빔밥은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에 매우 친숙한 음식이었다. 신분 고하를 떠나 실생활에서 쉽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밥상. 그만큼 한민족의 정서에 꼭 맞는 일상의 먹거리였다.


비빔밥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유래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밥, 고기, 나물 등을 상에 놓고 제사 지낸 뒤 후손들이 그 음식을 고루 비벼 나눠 먹었다는 제사음복설, 농번기에 구색 갖춘 상차림이 어려워 여러 음식을 한데 섞어 먹었다는 농번기음식설, 조선조의 임금이 점심으로 가볍게 먹는 비빔에서 유래했다는 궁중음식설 등이 그것이다.


전주비빔밥은 이중 궁중음식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궁중음식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민음식으로 퍼졌다는 것. 전주시에 따르면, 조선조 때 '감영(監營) 내의 관찰사, 농악패의 판관 등이 입맛으로 즐겼고 성(城) 내외의 양가에서는 큰 잔치 때나 손님을 모실 때 외에는 입 사치로 다루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으로 봐 비빔밥은 고관들이 식도락으로 즐긴 귀한 음식이었다.


비빔밥의 명칭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살펴보자. 조선 순조 때(1849년) 저술된 '동국세시기'에는 '골동지반(滑董之飯)'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러 가지 재료가 고루 섞여 있는 밥'이라는 뜻. 1913년 초판이 나온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에서 '부빔밥'이라고 했다가 이후 '비빔밥'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전주비빔밥은 평양냉면, 개성탕반과 함께 조선의 3대 음식으로 꼽혔다.

 

◇ 콩나물, 황포묵 등 풍미 더해

현재 전주에는 한국집, 성미당, 고궁, 중앙회관, 한국관, 가족회관 등 내로라하는 비빔밥 전문식당이 성업 중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곳이 1952년 문을 연 한국집. 이어 1960년대에 중앙회관(1960년)과 성미당(1965년)이 개업하고, 1970년대에는 한국관(1971년)과 고궁(1973년)이 차례로 그 대열에 합류했다. 가족회관이 문을 연 때는 1980년.


궁중음식설에 걸맞게 전주비빔밥은 풍부하고 우수한 식재료를 바탕으로 멋과 맛을 한껏 드러낸다.


앞에서 언급한 재료 외에도 고사리, 오이, 호박, 도라지 등에다 대추, 밤, 지단 등의 고명까지 모두 30여 가지가 합세한다. 이들 식재료가 밥과 콩나물 위에 차례차례 둥그렇게 놓여 보는 미감(美感)과 먹는 미감(味感)을 동시에 충족시켜준다. 이 가운데 콩나물과 황포묵, 고추장, 소고기 육회, 간장은 전주비빔밥만의 풍미를 살려주는 주역으로 꼽힌다.


20년 동안 비빔밥과 함께 살아왔다는 유상권(48) 한국집 조리사는 "신선한 식재료와 참기름, 고추장, 간장이 깊으면서도 은은한 비빔밥의 맛을 살리는 데 중요한 요소"라며 "우리 식당이 오래전부터 고추장, 된장, 간장을 직접 담가 사용해오는 이유"라고 귀띔했다. 재료 본연의 깊은 맛을 내기 위해 전통방식을 오롯이 지켜오고 있다는 얘기다.


전주비빔밥은 뜨겁게 데워진 유기그릇에 담겨 밥상에 올려진다. 손님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먹도록 하기 위해서다. 볶은 소고기가 들어가는 전통비빔밥과 생고기가 얹혀지는 육회비빔밥이 일반적인데 돌솥에 뜨거운 비빔밥이 담긴 돌솥비빔밥도 고령층을 중심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식당별로 다소 차이가 있으나 반찬은 상추 겉절이, 콩자반, 김치, 야채 샐러드, 야채전 등 예닐곱 가지가 밥상에 놓인다. 비빔밥 옆에 시종처럼 다소곳이 놓인 콩나물국은 시원한 식감을 더하는 청량제 구실을 한다.


비빔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요리사의 솜씨에 못지않게 먹는 이의 정성도 중요하다. 젓가락으로 저어야 밥이 잘 섞이는 것으로 일부 알려졌지만 숟가락을 이용해 정성껏 비벼주는 게 깊은 맛을 즐기기에 더 좋다고 한다.


재료가 고루 비벼진 비빔밥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식재료의 융합과 협치의 결과랄까. 고추장에 버무려진 밥은 달착지근하면서도 매콤한 맛으로 멋스럽게 수저에 담긴다. 먹을 때 전주의 대표 술인 모주까지 한 잔 곁들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친구들과 함께 전주 관광을 왔다는 이현정(39·서울) 씨는 "갖가지 나물 향이 은은해서 좋다. 막 채취한 나물처럼 신선하고 맛도 담백하다"며 "알알이 살아 있는 밥맛도 그만인데 놋그릇에 담겨서인지 그런 느낌이 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남자 친구와 여행 온 최유진(29·경기 화성) 씨도 "평소에는 고추장을 잘 못 먹는데 전주비빔밥에선 매운맛이 거부감없이 부드럽게 받아들여진다"면서 "콩나물국도 맛이 깔끔하고 개운하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싱가포르에서 온 관광객인 쓰 롱 게리(24) 씨는 "비빔밥이 한국의 음식문화를 직접 느껴보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아주 향긋해요(Very spicy)! 만족해요(Good)!"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14999280335130.jpg 전주비빔밥에 들어가는 오색오미의 식재료들

 

◇ 세계화 넘어 우주 식품으로 진화

전주비빔밥은 그 명성에 걸맞게 전국화와 세계화를 넘어 우주 식품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전국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서울 등 곳곳에 전주비빔밥 전문식당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와 함께 미국, 중국 등 외국에서도 꾸준히 전주비빔밥의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다. 비빔밥연구센터를 개소한 전주시는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비빔밥 개발과 마케팅 활동을 추진 중이다. 나아가 우주공간에서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우주식을 개발한 데 이어 향후 우주정거장은 물론 화성탐사 프로젝트에도 공급할 예정이다.


전주비빔밥을 앞세운 '전주비빔밥축제'는 매년 10월 열린다. 올해로 11회째인 비빔밥축제는 전주시의 33개 동 주민들이 비빔밥을 마련해 관람객과 나눠 먹는 대형 비빔밥 퍼포먼스, 전국의 요리학과 학생과 전문가가 다양한 비빔밥 요리를 선보이는 전국요리경연대회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진다. 맛, 멋, 흥이 한데 버무려지는 대표적 음식축제다.


전주에서 비빔밥을 먹고 나서는 전통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명소를 들러보면 더욱 좋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풍남동과 교동 일대의 전주한옥마을. 전통한옥 700여 채가 들어선 이곳은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한옥촌이다. 경기전, 오목대, 향교, 한벽당, 풍남문 등을 차례로 돌아보면서 선비문화의 멋을 느껴볼 수 있다. 여름이면 연꽃향 그윽한 덕진공원도 찾아볼 만하다.

14999280361979.jpg 전주한옥마을의 경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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