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米壽) 맞은 한국 첫 웨슬리 신학자 조종남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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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米壽) 맞은 한국 첫 웨슬리 신학자 조종남 박사>

 

한국 첫 웨슬리 신학자 조종남 박사
한국 첫 웨슬리 신학자 조종남 박사
(서울=연합뉴스) 올해 한국 나이로 88세, 미수(米壽)를 한국의 첫 웨슬리 신학자 조종남 서울신학대 명예총장이 1일 서울 정동에서 교황 방한과 한국 개신교의 쇄신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서울신학대 제공)

"교황 방한, 개신교 자성의 기회", "한국교회, 중세 가톨릭 수준으로 퇴보"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교황이 한국에 오시면 좋은 일이지 종교가 다르다고 반대하고 심통을 부릴 필요가 뭐 있습니까?"

올해 한국 나이로 88세, 미수(米壽)를 맞은 조종남 서울신학대 명예총장은 한국 최초로 웨슬리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개신교의 원로 신학자다.

존 웨슬리(1703∼1791)는 영국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18세기 영국 산업사회의 부패상을 변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웨슬리 정신은 오늘날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 박사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로잔운동'이라 불리는 사회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다. 

오는 8일 유석성 현 서울신학대 총장을 비롯한 제자들로부터 미수 기념 문집을 봉정받는다. 그를 5일 서울 정동에서 만났다.

조 박사는 개신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서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를 질타했다.

"교황의 방한 목적은 정의와 평화에 초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를 위함이며,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방문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개신교는 교황 방한을 자성과 갱신의 기회, 교회 연합의 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는 "교황은 적이 아니며, 가톨릭 교회 역시 개신교의 배타적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상대의 신앙을 이단시하거나 자신의 종교만 옳다는 배타적 태도는 이미 오래전에 역사적 유물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두 종교는 1555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협약과 1648년 베스트팔렌 종교평화협약을 통해 상호 관용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조 박사는 이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대한 개혁으로 출발한 개신교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2017년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은 중세 가톨릭교회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퇴보했습니다. 교회는 외형과 규모를 비교하면서 경쟁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그는 믿음과 생활의 이원화 현상을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믿음만 강조한 나머지 개인의 윤리생활과 사회정의를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고 이런 풍조가 교회의 부패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믿음은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이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생활의 변화, 교회와 사회를 거룩하게 하는 사역을 강조한 것이죠."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조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웨슬리가 그랬던 것처럼 선교와 사회참여는 같이 가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도 결국은 사회참여가 미흡했다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교회 쇄신을 통한 사회 개혁을 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얘기와 다르지 않다.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딴 조 박사는 올리벳대학교 교수를 하다 서울신학대에 온 지 한 학기 만에 총장(당시 학장)으로 선임됐다. 당시 나이가 마흔둘이었다.

"다른 학교 총장들은 아무리 젊어도 예순이 훌쩍 넘은 경우가 많았어요. 두려운 마음에 바로 수락하지 않고 열흘간 기도하고 지인들한테도 조언을 구했습니다. 에모리대 교수님이 학장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학자로 남았어도 좋을 걸 그랬어요." 

평생의 신학 공부와 신앙생활에서 얻은 깨달음을 묻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예수 믿는 거 이상 좋은 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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