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왕훈의 데자뷔> 정치인 DNA, 기업인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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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왕훈의 데자뷔> 정치인 DNA, 기업인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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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추왕훈 논설위원 =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에 도전한 도널드 트럼프의 돌풍이 예사롭지 않다. 이미 선거 전부터 각종 여론조사에서 우세를 나타내기는 했지만, 정치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고 별다른 세력기반도 없는 그였기에 반짝인기를 끌다 초반에 나가떨어질 것으로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웬걸, 첫 경선이 열린 아이오와에서만 2위에 그쳤을 뿐 뉴햄프셔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네바다주에서 1위를 차지해 확고한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이제는 그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이 '반(反) 트럼프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는 누구인가. 2000년대 초반 '너는 잘렸어(You're fired)'라는 대사로 유명한 NBC TV의 리얼리티 쇼 '견습사원(Apprentice)'을 통해서 이름과 얼굴을 널리 알리게 됐지만, 그는 이미 그 이전에도 남부러울 것이 없는 '금수저'이자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트럼프는 1946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부터 부동산업자였던 아버지의 주택개량 및 임대사업에 참여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뉴욕 일원의 부동산 개발사업을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사업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성공적으로 확장한 비상장기업 '트럼프 오거나이제이션(The Trump Organization)'은 미국 주요 도시는 물론 세계 곳곳의 업무용ㆍ주거용 빌딩과 호텔, 카지노, 리조트 등을 개발ㆍ운영하고 있다. 현재 그의 재산은 최소 33억 달러에서 많게는 1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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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검은돈'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재산 가운데 1억 달러를 선거에 쓰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미국 대선에서 후보들의 영향력과 인기, 당선 가능성은 선거자금의 모금 규모와 비례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트럼프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2월 초까지 트럼프가 모은 선거자금은 2천100만 달러로 공화ㆍ민주 후보를 통틀어 10위에 그치고 있다. 1위인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1억6천300만 달러를 모금한 것과 비교하면 트럼프의 선거자금 규모가 얼마나 초라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선거자금 모금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대선 후보들의 주된 돈줄인 슈퍼 팩(Super PAC·미국 연방선거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무제한으로 선거 자금을 지원하는 조직)의 자금을 거절하고 있다. 트럼프가 경선 초기 선두를 질주하고 있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이처럼 기업인으로서 검증된 역량, 기존 정치인들처럼 정치자금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본인이나 그 지지자들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업인 출신 정치가로서 성공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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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 <<백악관 홈페이지>>

미국의 경우 건국 초기에는 당시 기준으로 '대기업'이라고 할 만한 대농장주 출신의 대통령이 꽤 많았지만, 20세기 이후 '기업인 출신'이라고 칭할 수 있는 대통령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1874~1964)가 '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오와주 시골 마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후버는 1891년 막 개교한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해 지질학을 전공했다. 이후 호주와 중국 등의 광물업체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거나 직접 회사를 차려 많은 돈을 모았다. 40세 때 재산이 당시로써는 거금인 400만 달러나 됐다고 한다. 기업인으로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대통령으로서는 '경제 전문가'답지 않게 대공황을 예견하지도, 올바로 대처하지도 못해 국민을 도탄에 몰아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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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41대 부통령 넬슨 록펠러와 부인 해피 록펠러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최고의 재벌 가문 가운데 하나인 록펠러가(家) 출신의 넬슨 록펠러(1908~1979)는 체이스 내셔널 은행, 록펠러센터, 크레올 석유 등 가문 소유 기업에서 근무하다 1960년, 1964년, 1968년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모조리 낙선했다. 리처드 닉슨의 사퇴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포드에 의해 부통령에 지명됐으나 의회 청문회 과정에서부터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 등 고위관료에 대한 금품지급, 정치적 라이벌 아서 골드버그 의원에 대한 음해공작, 편법 세금공제 등으로 난타를 당했다. 재직 중에도 포드 대통령이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전혀 권한을 위임하지 않았고 당시 비서실장이던 도널드 럼즈펠드까지 견제에 나서는 바람에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의 재직 중 건설된 부통령 관저에 수백만 달러어치의 가구를 기증한 것이 부통령으로서 유일한 업적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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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총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가 출신 정치인으로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ㆍ1918~1993)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건설회사 사환으로 고학하며 비인가 실업계 고교를 다닌 것이 최종학력이었던 그는 군 제대 후 결혼하면서 처가가 운영하던 건설회사를 물려받아 시공실적 전국 50위 이내의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현대판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 명문가 출신들이 득세하는 일본 정계에서 자수성가한 기업인 출신의 다나카는 독특한 존재였다. '서민 정치인'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동시에 비리와 정경유착의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건설업자와 의원, 관료집단 간 커넥션을 의미하는 '토건족(土建族)'이라는 용어도 사실은 다나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진 정치인들에게 자금과 조직을 지원하면서 일본 자민당 내 최대 계파를 이끌게 된 다나카는 1972년 총리가 됐고 취임 초기 역대 총리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월간지의 폭로로 개발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부동산투기 사건에 다나카가 연루된 의혹이 제기되고 의회가 조사에 나서면서 불명예 퇴진했다. 그리고 1974년 '록히드 사건'이 불거지면서 일본 역사상 전직 총리로서는 최초로 검찰에 구속되는 오명을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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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현대 유럽의 기업가 출신 정치인으로는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1936~ )가 있다. 밀라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베를루스코니는 1960년대 말 아파트 건설에서 벌어들인 수익금을 종잣돈으로 미디어 사업에 진출한 뒤 탁월한 수완으로 확장을 거듭해 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하는 '미디어 제국'을 건설했다. 베를루스코니 일가가 지배하는 지주회사 피닌베스트는 이탈리아 최대의 방송ㆍ엔터테인먼트 업체 메디아셋과 금융업체 메디올라눔, 신문ㆍ출판업체 몬다도리, 축구단 AC밀란 등을 거느리고 있으며 2014년 매출액이 약 47억 유로에 달했다. 미국의 경영잡지 포브스는 2013년 베를루스코니의 재산이 9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와 탈세, 뇌물 등의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58세이던 지난 1994년 정계 진출을 결심한 이유가 "감옥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우파 세력들을 구워삶아 초선의원으로서 일약 총리 자리까지 거머쥐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총리에 올랐다 물러나기를 반복했지만 '부패'의 꼬리표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뇌물수수, 불법 정치자금 운용, 횡령, 탈세, 회계부정에서 마피아 지원, 심지어 미성년자 성매매에 이르기까지 연루된 사건을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힘들 지경이며 일부 사건은 지금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하원의원 54명, 상원의원 42명이 소속된 정당 '포르자 이탈리아'를 이끄는 등 아직도 이탈리아 정계의 실력자로 행세하고 있다.


고대에도 '돈을 지배하는 자'의 정치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로마 공화정 말기 '삼두 체제'의 한 축이었던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는 요즘으로 치면 '재벌급'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부호였다. 그러나 정치력도, 군사적 재능도 평범했던 그는 '업적'을 쌓기 위해 출정한 파르티아(현대의 이란ㆍ이라크)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막상 권력을 잡은 것은 항상 돈이 없어 쩔쩔맸고 크라수스에게도 손을 벌리기 일쑤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금력을 바탕으로 권력까지 추구했던 대표적 인물로 전국시대의 대상인이었던 여불위(呂不韋)를 꼽을 수 있다. '투자'에 안목이 있었던 그는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와 있던 진나라의 왕자 자초(子楚)의 '미래가치'를 알아보고 애첩까지 갖다 바치는 정성을 들인 끝에 자초가 후일 왕위를 이어받자 진나라 승상에 올랐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여불위는 이제는 왕후가 된 옛 애첩과 불륜 관계를 이어가다 왕위를 계승한 진시황에게 발각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로마나 중국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이래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부유한 소수의 재산가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금권정치(Plutocracy)'는 타락한 정치 형태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업인 출신으로 성공한 정치가가 많지 않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기업경영과 정치는 그 목적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과정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기업인은 행동방식과 사고방식도 다르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기업은 '최대의 이익 실현'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의 역량을 집중하면 된다. 그러나 정치가는 여러 상충하는 목표 가운데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많은 이해관계자를 설득해 타협을 끌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 비능률도 감수해야 한다. 유권자들은 성공한 기업인이 나라를 이끌게 되면 최소한 경제에서만큼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기업인의 '성공 DNA'가 전혀 다른 생태계인 정치에서는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두 세계에서 모두 성공하려면 월등한 유연성과 적응력이 있어야겠지만, 이런 사람은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트럼프가 현재의 기세를 몰아 대통령이 된다면 앞서 거론한 '선배들'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미국 대통령의 실패는 전 세계에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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