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열전> ⑫ '만주의 로렌스,' 도이하라 겐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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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열전> ⑫ '만주의 로렌스,' 도이하라 겐지(上)

(서울=연합뉴스) 김선한 기자 = 일본 수도 도쿄(東京) 중심가 지요다(千代田) 구에 있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일본 군국주의 악몽을 상징하는 이곳에는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태평양전쟁의 주역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A급 전범 7명도 합사되어 있다 .


사형을 받은 A급 전범 중의 한 사람인 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45년 8월 15일 종전 당시 일본 본토 방위를 담당한 제1 총군 사령관이던 그는 수십 년 동안 중국을 주 무대로 비밀 첩보전을 지휘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주석과 함께 중국 현대사의 한 축이었던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蔣介石) 초대 총통이 "도적놈 하라"(土匪原)로 부르며 A급 전범 명단에 반드시 포함하라고 요구할 만큼 도이하라는 온갖 모략으로 중국을 사분오열 시킨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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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의 도이하라 겐지[위키피디아 제공]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의 실제 주인공인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를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에 올리고, 중국인을 아편(마약)에 중독시키는 등 전시 일본의 첩보 역량을 과시한 대표적 인물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중국 동부 지역 방언까지 포함해 11개국 언어에 능통해 '만주의 로렌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출세를 위해 택한 직업군인의 길… '멘토' 도조 히데키 도움으로 승승장구

일본 혼슈(本州) 서부 오카야마현(岡山縣)에서 1883년 변변치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도이하라가 출세를 위한 탈출구로 선택한 것이 바로 군이었다.


엄청난 노력파인 그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정통 엘리트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세 가도는 이내 복병을 만났다. 내세울 것 없는 집안 배경으로는 출세 가도의 꿈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집안 좋은 동기들이 이미 요직에 포진해 승승장구하는 데 반해 40세가 넘은 나이에도 소령 계급에 머문 자신을 보면서 돌파구 마련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더구나 전쟁도 없는 시대라서 자칫하면 전역 위기에 내몰릴 가능성도 컸다.


그러나 돌파구는 가까이 있었다. 바로 15살 된 사촌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의 미모는 주위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빼어났다. 도이하라는 여동생에게 중요한 곳에 쓸 데가 있다며 나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여동생은 아버지뻘이나 마찬가지인 친척 오빠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어 응했다.


이렇게 촬영한 사진을 그는 어렵게 만난 황가의 한 왕자에게 보여주었다. 선정적인 사진을 보자마자 넋이 빠진 왕자는 소녀를 불러들였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결국, 도이하라는 여동생을 왕자의 후처로 보내는 조건으로 자신의 진급과 보직 전보를 내걸었다.


왕자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이하라에게는 중국 주재 일본대사관 육군 무관보의 보직이 주어졌다. 당시 육관 무관은 훗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데 앞장선 도조 히데키였다. 육사와 육대 선후배인 두 사람은 이내 호흡을 맞췄다. 이런 호흡은 훗날 전범재판정까지 이어졌다.


◇ 비밀공작에 천재성 발휘…국민당 정부 최고위층에 잠입

중국 베이징(北京)은 도이하라에게 첩보활동을 펼치는 데 이상적인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중국 주재 대사관을 중심으로 온갖 형태의 첩보활동과 비밀 정치공작에 여념이 없었다.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중국어 습득에 몰입하는 한편 음모, 태업, 요인암살, 기만, 뇌물제공 등 공작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의 붕괴와 지배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우선 신생 국민당 공화국 정부를 서서히 붕괴시켜 훗날 원활한 침략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도이하라는 이내 천부적인 솜씨를 발휘했다. 중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사업가 집단으로 최고위층과도 연결된 조직 '안푸'(安福)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단체 회원 몇 명을 포섭한 그는 이들을 통해 중앙정부 고위층 회의 석상에서 논의되는 사안들을 훤히 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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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작전 중인 일본 관동군[위키피디아 제공]

소극적인 정보 수집 활동에서 벗어난 적극적인 비밀 파괴공작도 돋보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직폭력배들을 포섭해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조직 규합공작이었다. 영화 같은 장면도 연출됐다. 포섭한 조폭들이 일으킨 격렬한 '가짜 시위'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고위관리들을 도이하라가 극적으로 구출해 그들의 환심을 사는 공작은 영화와 다름없었다.


도이하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고위관리들은 기꺼이 그의 정보원이 됐다. 이 덕택인지 그는 장제스(蔣介石)가 이끌던 국민당 정부의 고문이 됐다. 이어 만주 등 동북 지역을 지배하던 군벌 장쭤린(張作霖) 폭사 사건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성공적인 공작으로 도이하라는 이내 주목을 받았다. 대령으로 승진하자마자 그는 톈진(天津) 특무기관장으로 영전했다. 또 보직 관리 차원의 하나로 잠시 보병연대장으로 근무하다 다시 특무기관장으로 복귀했다.


만주를 포함한 동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펑톈(奉天) 특무기관장으로 영전한 도이하라는 본격적인 비밀공작에 나섰다. 당시 일본은 철, 원유 등 광물이 풍부한 만주 지역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부에서는 도이하라에게 만주 확보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백지 위임장을 주기도 했다.


◇ 중국을 마약에 취하게 해라… 아편 공작

도이하라의 중국 내 공작 가운데 가장 큰 분노를 산 것이 바로 아편 공작이었다. 만주를 시작으로 중국 전역을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은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사회를 교란해 전의를 상실하게 하려면 마약인 아편에 취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비밀공작을 주도한 도이하라는 먼저 만주 지역에 방대한 첩보망을 구축했다. 최상부 조직 아래는 독자적으로 기능하는 3개의 조직망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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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점령 당시인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던 아편[위키피디아 제공]

그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 혁명을 피해 만주로 도피해온 5천여 명 규모의 러시아계 범죄자들로 구성된 조직이었고, 다른 하나는 귀족 출신 등 일본의 환심을 사려고 혈안이 된 백계 러시아계 조직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일본의 지원으로 분리독립을 하려는 8만여 명의 자발적인 협력자 조직이었다.


아편 공작을 위해 도이하라는 우선 중국인 협력자들을 내세워 만주 지역 아편 거래 시장의 통제권 장악에 나섰다. 도처에 형성된 아편굴들을 접수하는 한편 마약 판매상들도 휘하에 끌어들였다. 자연스럽게 마약 거래는 도이하라가 이끄는 일본 첩보조직의 독점사업이 됐다.


또 아편 중독자 양산을 위해 농산물 장터가 들어서는 곳마다 임시막사를 세워 결핵 치료 약이라며 아편을 공짜로 나누어주었다. 이와 함께 도이하라는 상부를 설득해 '황금박쥐'(Golden Bat)라는 중국 수출 전용 담배 브랜드도 출시했다.


시중에 유통되는 다른 브랜드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대량 판매된 이 담배에는 소량의 아편과 헤로인 등 마약 성분이 들어 있었다. 싸고 질 좋은 이 담배를 찾는 중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중독자도 자연스럽게 급증했다. 담배 공급권을 가진 일본 마약조직들도 도이하라의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중국은 이제 급증하는 아편 중독자로 골머리를 앓게 됐다.


본격적인 침략에 앞서 일본은 중국 전역을 서서히 마약에 중독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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