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경성도 전세난에 월급 23% 주거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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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문화

1930년대 경성도 전세난에 월급 23% 주거비로

"물가상승에 전세→월세 전환"…이승일 교수 분석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작금의 경성은 사글세집이 다 나가고 업서서 전세가 엇지나 빗싸젓는지 주택난과 아울너서 이중 고통을 밧고 잇는 현상이여서 이대로 방님아얏다가는 중대한 사회문제를 야긔할 염녀가 잇다하야…집주인들은 물가가 앙등한다는 것을 핑계삼어서 인위적으로 집세를 올려가지고 하급 쌀라리맨을 궁핍한 구렁으로 노라너헛슬뿐만 아니라…"(매일신보 1937년 5월20일자)


1930년대 일제 치하 경성의 주거난이 오늘날 서울처럼 심각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요즘 말로 중산층에 해당하는 조선총독부·경성부(京城府) 직원도 다를 바 없었다.


7일 이승일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1930∼1940년대 경성 거주 급여 생활자의 주거 생활'에 따르면 1939년 경성부에는 77만4천286명, 15만4천223세대가 살았는데 가옥 수는 8만5천464동에 불과했다.


본인 소유 가옥이 없는 부민들은 집세를 지불하고 거주(차가·借家)하거나 방 한두 칸을 빌려 셋방살이(간차·間借)를 했다. 주거비를 정기적으로 내지 못하는 빈민층은 하숙·여관·기숙사, 심지어 토막(土幕)에서 생활하는가 하면 집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방 한 칸을 빌려 살기도 했다.


당시 신문기사 등을 종합하면 경성 인구 70여만명의 60%인 42만명이 제집 없이 차가 등으로 생활했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서울시가 지난해 발표한 서울시민의 자가주택 보유비율은 41.2%였다.


주택임대 방식이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되는 시기라는 점도 오늘날과 비슷했다. 당시 전세는 가옥 소유자가 돈을 빌리면 채권자는 이자를 받지 않고 가옥에 거주하는 형태였다. '전세가율'은 50∼70% 정도였다.

집주인들이 점차 월세를 선호하게 된 데는 매일신보가 지적하듯 물가상승의 영향이 컸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임차 기간이 긴 전세가 불리했다. 게다가 월세의 경우 계약기간이 없어 더 비싼 임차료를 부르는 세입자가 나타나면 아무 때나 계약해지가 가능했다. 일본인들이 서울의 가옥을 대거 사들이면서 일본의 월세 관행이 유입된 탓도 있었다.


공무원들도 월급의 4분의 1가량을 주거비로 지출하며 팍팍한 생활을 했다. 여기에는 일본인 직원과의 차별대우도 한몫했다.


조선후생협회가 1940년 3월 조선총독부·경기도청·경성부청 직원 1천953명의 주거 실태를 조사한 결과 조선인은 월평균 61.59엔을 벌어 14.12엔(22.9%)을 차가 등 주거비로 지출했다.


반면 일본인 직원의 수입은 127.78엔으로 조선인의 배를 웃돌았다. 주거비로는 평균 23.84엔을 썼는데 그만큼 넓은 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인은 상대적으로 좁은 집에 거주하면서도 가족 수는 일본인(4.28명)보다 많은 평균 6.14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산업계에 주택건설을 독려하고 임대료 인상 폭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1930년대 중반 경성 인구가 매년 4만명씩 증가한 데 비해 주택은 한 해 2천호 정도 느는 데 그쳤다. 집주인들은 행정단속을 피해 임대료를 올렸는데 이는 집주인들의 욕심이 아니라 경제정책에 따른 물가상승 탓이라고 논문은 분석했다.


이 교수는 '경성부 호구통계' 등 자료를 토대로 당시 경성의 주거난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려는 정책적 의지가 박약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을 위한 값싼 임대용 주택 건설은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논문은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발행하는 계간 '한국민족문화' 최근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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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서울 마포 일대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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