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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인생> 김범수 "난 상향평가돼…소리꾼 한길 가겠다"고 3때 친구 덕에 노래 재능 발견…빌보드 한국가수 첫 진입·국민 히트곡도 내데뷔 15년, 가장 빛난 무대는 '나는 가수다'…자작곡 채운 8집 계획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김범수(35)의 꿈은 복음성가(CCM)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인기와 부를 얻은 지금의 자리는 엄두도 내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여겼다. 올해로 데뷔 15주년을 맞은 김범수는 최근 강남구 신사동에서 한 인터뷰에서 "가수로서 지금의 위치가 내 나이와 경력에 비해 조금 더 상향 평가됐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종교 음악을 하고 싶었고 TV 출연하는 엔터테이너보다 대학로 어딘가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그렸으니 꿈이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은 셈이다. "달려와 보니 너무 과분한 자리에 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실 지금 출연 중인 엠넷 '슈퍼스타K 6' 심사위원도 누군가를 평가할 위치가 아니란 생각에 계속 고사했어요. 이승철, 윤종신 등의 선배들은 그 자리가 어울리지만 전 아니거든요. 그래서 심사도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조언을 해주자는 생각으로 임해요." 노래하는 재능을 발견한 게 고3 때였다. "음악은 카세트테이프가 닳도록 들었지만 이전까지 노래를 안 했다. 목소리를 발견하기 전까지 내 인생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강서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부모에게 반항적이었다. 공부를 못하는 '아웃사이더'였고, 친구들과 싸우기 일쑤였다. 또래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없었다. 고교 3학년 때 정보통신과에서 만난 친구인 허석(기타리스트)이 교회에 나가 찬양팀을 해보자고 한 게 음악에 발을 디디는 계기가 됐다. "허석은 신앙이 두텁고 착실한 친구였어요. 음악을 좋아하던 그 친구가 기타 치는 모습, 연주 소리가 너무 좋아서 교회로 따라나섰죠.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건 피아노를 둘러싸고 성가대 중창단이 연습하는 모습이었어요. 눈이 새롭게 떠지듯 신세계였어요." 이때부터 그는 성가대에서 활동했다. 성가대 친구들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했다. "가정 형편도 좋지 않아 옷도 못 입고 다녔는데 소리를 내니까 애들이 놀랐어요. 크리스마스 때도 솔리스트로 '오 해피 데이'를 불렀는데 음악적으로는 저의 첫 도전이었죠. 이때부터 동네에서 '노래 해봐라', '복음성가 앨범을 내보라'란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사실 중·고교 시절의 방황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며 시작된 도시 생활이 녹록하지 않은 탓이 컸다. 마산에서 그는 "장군동의 황태자였다"고 웃었다. "친척들이 동네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았어요. 먹고 싶은 건 슈퍼를 하는 할머니 집에서, 갖고 싶은 건 장사를 하는 이모 집에서 다 가질 수 있었어요. 이모와 여자 사촌들 사이에서 크며 사랑도 많이 받았죠. 그땐 생긴 것도 좀 귀여워 어딜가나 '예쁘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하하." 아버지가 먼 친척이 운영하는 공장 관리를 맡으면서 상경한 그는 양천구 신월동의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 일은 순탄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인형 눈을 붙이거나 미싱을 돌렸다. 금실 좋던 부모님의 싸움도 잦아졌다. "겨울이면 연탄가스가 새어나와 어머니가 잠을 깨워 김칫국물을 먹이곤 했어요. 여름엔 침수로 물을 퍼냈죠. 마산 생활이 꿈만 같았어요.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반항적으로 변해갔죠. 학교와 사회에 앙심을 품은 거죠. 하하. 이때 부모님이 정말 힘들어하셨어요." 교회에 나가고 음악을 통해 심적인 안정을 찾아간 그는 허석과 함께 숭실대학교 사회교육원 실용음악과에 정원 미달로 들어갔다. 이때 스승으로 만난 사람이 가수 박선주였다. 박선주도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기획사 오디션 제의를 했다. 그가 "복음성가 가수가 되고 싶으니 대중음악 할 생각이 없다"고 하자 박선주는 "가수로 잘 된 뒤 더 큰 영향력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1997년 처음 오디션을 본 곳이 1990년대 인기그룹 알이에프(R.ef)가 있던 팀엔터테인먼트였다. "오디션을 보고서 합격했는데 댄스 가수를 전문으로 양성하는 것 같아서 '저랑 안 맞는 것 같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네가 원하는 알앤비(R&B), 솔(Soul) 음악을 시켜주겠다', '멀리 보고 키워주겠다'고 약속하셔서 도장을 찍었죠." 그러나 기획사와 음악 방향에 대한 마찰도 있었고 주위로부터 외모 지적도 받는 등 대중 가수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그땐 그런 게 서러웠는데 당시 회사 대표님이 아니면 난 데뷔를 못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데뷔는 '늪'으로 한창 인기를 끌던 '얼굴 없는 가수' 조관우를 벤치 마킹해 '제2의 조관우'로 콘셉트를 잡았다. 조관우의 앨범을 작업한 작곡가 하광훈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그래서 나온 게 1집(1999) 타이틀곡 '약속'이다. 그러나 '약속'은 그가 소화하기에 조숙한 노래였고 10만장도 나가지 않았다. '얼굴 없는 가수'로 데뷔했지만 앨범 반응이 없자 TV 출연을 감행했다. "그때는 앨범 판매량이 매일 집계되던 시절인데 제가 TV에 출연하자 시청자의 반감이 생겼는지 판매량이 뚝 떨어졌어요. '넌 앞으로 TV 출연할 생각 말라'는 말도 들었죠. 마치 제 얼굴 때문에 앨범이 망한 것 같아서 스스로 하찮은 인간 같았어요." 1집을 내고서 '투자 가치가 없으니 그만 접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기획사는 되레 송혜교, 송승헌 등의 스타가 출연하고 호주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줬다. 2집(2000) 타이틀곡 '하루'다. 앨범 시장 침체가 시작된 상황에서 판매량 20만장을 기록했으니 '중박'이라고 여겼다. 이때 교민이 운영하는 미국 국도음반에서 연락이 왔다. '하루'를 영어곡으로 녹음해 김범수를 미국에 진출시키자는 제안이었다. "한국에서도 안 유명한데 사실 허황된 도전이었죠. 미국에서 제임스 잉그램과 함께 했던 프로듀서가 날아와 편곡했고 '하루'를 '헬로 굿바이 헬로'란 영어곡으로 녹음했죠. 그때로선 나름 치밀하게 준비했어요. 하하." 이 곡은 2001년 빌보드의 부문별 차트인 '핫 100 싱글즈 세일즈' 차트 51위로 진입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 가수의 빌보드 진입은 처음이었다. 이때의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빌보드 차트를 인터넷에서 바로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여서 빌보드 잡지를 미국에서 받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이 소식이 기사화되자 사람들은 '사기가 아닌가'라고 수군댔다. 결국 김범수는 '9시 뉴스'에 출연해 이를 확인시키며 논란을 잠재웠다. "지금은 싸이 형이 빌보드 메인차트에서 2위를 하며 엄청난 역사를 썼지만 당시로선 빌보드의 벽을 송곳, 숟가락으로 살짝 파본 거죠. 돌이켜보면 가수 인생의 의미 있는 도전이고 흔적이에요. 그땐 두려움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가수로서의 절정은 3집(2002) 타이틀곡 '보고싶다'가 히트하면서다. 처음에 이 곡은 '국민송'으로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지만 드라마 '천국의 계단'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로 쓰이면서 국민 히트곡이 됐다. 이 드라마가 일본에 수출돼 그는 일본 진출 기회를 얻었고 2천~3천석 규모의 공연도 했다. "나에겐 어마어마한 노래"라고 했다. 팀엔터테인먼트에서 5집(2006)까지 낸 그는 기획사와 계약을 마무리하고 군 복무를 시작했다. 7년 동안 달려오며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터라 군대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됐다. 2007년 어느 날, 작곡가 황찬희의 소개로 지금의 기획사인 폴라리스엔터테인먼트 이종명 대표가 군대로 면회를 왔다. 황찬희는 1999년 삼수를 해서 입학한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동기다. "신생 기획사였지만 대표님의 마인드가 좋았어요. 신앙도 같았고요. 제대 6개월 전부터는 매주 면회를 오셨는데 가수로서의 비전만 제시할 뿐 계약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그 시간이 기다려지더군요." 2008년 제대한 그는 폴라리스와 3년 전속 계약을 맺은 뒤 최근 두 번째 재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곳에서 처음 낸 6집(2008) 타이틀곡 '슬픔활용법'은 황찬희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후 '지나간다'(2010), '끝사랑'(2011) 등의 히트곡을 냈다. 그는 "이 회사에서 '보고싶다' 만큼 대박 난 앨범은 없지만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의 갈증이 해소됐다"며 "내 나이의 감성에 맞는 음악을 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카네기홀(2012), 호주 오페라하우스(2014)에서도 단독 공연을 열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쌓은 내공을 해외 무대에서도 펼쳐보였다. "카네기홀 공연이 '솔드 아웃' 됐는데 너무 감격스런 일이었어요. 제가 생각한 가수의 방향이 소박했기에 이런 권위있는 홀에서 공연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시 무대에 압도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그는 가수로서 가장 빛난 무대로 2011년 MBC TV '나는 가수다'를 꼽았다. 이때 남진의 '님과 함께'로 경연했는데 "지금껏 살면서 가장 김범수다운 만족스러운 무대"라고 말했다. 이 방송에서 파격적인 패션과 무대 연출을 선보이며 '비주얼 가수'란 수식어도 생겨났다. 그는 "이 무대는 내 음악 인생을 통째로 뒤집는 사건이었다"며 "객석에선 기립 박수를 보냈고 이 곡으로 음원차트 1위도 했는데 내 인생에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후 내가 가진 루저로서의 상처, 외모 열등감, 피해의식이 한꺼번에 치유됐다. 더는 '누가 못생겼다'고 해도 상처가 안 될 정도로 자존감이 높아진 계기였다.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웃었다. 그는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인복이 많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히트곡을 만들어준 윤일상을 비롯해 하광훈, 황찬희 등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가 마음속에 꼽는 여러 조력자 중 하나로 남동생도 꼽았다. 남동생은 현재 자신의 기획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동생은 처음에 이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왔죠. 애물단지가 될까 걱정했어요. 일부러 모른 척했는데 기특하게도 운전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지금은 매니지먼트 장이 됐어요. 이젠 동생 없이 일이 안될 정도로 제가 도움을 받는 위치가 됐죠." 아버지에 대한 뭉클함도 있다. 그는 "내가 말썽을 피우자 아버지에게 한밤중 팬티만 입고 왕복 4차선 도로로 쫓겨난 적도 있다"며 "가수의 길까지 반대하셔서 아버지와 불협화음이 있었다. 솔직히 싫어했다"고 고백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데뷔 때부터 제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걸 서랍에서 발견했어요. 아버지가 절 지지해준다는 걸 처음 느꼈죠.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은 연세가 든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내요. 가끔 사우나도 같이 가는데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15년을 보낸 지금 그는 이승철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보컬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간간이 자작곡을 앨범에 실었지만 신승훈, 김동률 같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이미지는 빈약하다. 그는 "난 소리꾼이니 '소리로 끝까지 가자'는 생각은 확고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현재 작업 중인 8집에서는 전곡을 공동 작곡하는 도전을 했다.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서다. "8집이 지금껏 들려준 음악과 변화가 커서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요. 흥행에 성공 못 할 수도 있고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요. 대중이 제 얘기를 담은 앨범을 신선하게 받아들여 준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 같아요." 마침 인터뷰한 날은 같은 소속사 걸그룹으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레이디스코드의 멤버 고(故) 은비의 49재였다. 사실 그의 8집은 이 사고로 발매가 미뤄졌다. 그는 갑작스러운 아픔을 겪으며 가수로서 해야 할 목적이 하나 더 생겼다고 말했다. "이 친구들이 데뷔를 준비하며 고생한 걸 다 봤어요. 이제 시작인데 꿈이 꺾이니 혼란스럽더라고요. 이 친구들 몫까지 열심히 하는 게, 이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게 선배로서 제가 해야 할 역할인 것 같아요." 그렇기에 음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슈퍼스타K 6' 심사 때 재벌 2세로 태어나는 건 안 부럽지만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럽단 얘길 한 적이 있다"며 "그 어떤 부와 유산보다 음악적인 재능은 바꾸고 싶지 않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가수의 길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주위에서는 가수도 한때라며 '투잡' 하라는데 전 돈을 벌어도 어디에 투자한 것 없이 차곡 차고 모으는 스타일이죠. 다른 일로 스트레스받으면 노래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반감될 것 같아요. 노래만 할 수 있다면 조금 어려운 상황이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나이도 어느덧 30대 중반이다. 주위 친구들도 하나 둘 가정을 꾸렸다. 그는 그간 스캔들 한번 없이 사생활도 밋밋했다. "아직은 저를 확 줄이고 아내와 자녀로 제 생활을 채울 자신이 없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정을 꾸리면 그 소중함을 잘 아니까요. 나이에 쫓기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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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불여일견…안방극장 장악한 세 여배우>'왔다! 장보리' 이유리, '마마' 송윤아·문정희 불꽃열연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드라마의 완성도와 수준을 놓고 혀를 차도 어쩔 수 없다. 개연성을 두고 손가락질을 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의 연기는 일단 한번 보고 말을 해도 해야 할 것 같다. 통속극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던 불꽃 열연이 안방극장을 수놓는다. 종영을 1~2주 남겨둔 MBC TV '왔다! 장보리'의 이유리(34)와 MBC TV '마마'의 송윤아(41), 문정희(38) 얘기다. 이들의 열연은 지상파 방송3사가 야심차게 내놓는 월화극과 수목극이 총체적으로 난국인 상황이라 더욱 화제다. 또 힘을 준 시대극이나 사극도 아닌, 평범한(어쩌면 평범 이하일 수도 있는) 통속극 속에서의 열연이라 더욱 빛난다. ◇ 이유리 - 심은하의 '청춘의 덫' 밥신 이후 최고 연기 종영을 단 2회 남겨둔 '왔다! 장보리'는 악녀 연민정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상태다. 연민정의 악행이 하도 기상천외하고 '불굴의 의지'로 끊임없이 전개되는 까닭에 '왔다! 장보리'는 뒤로 갈수록 '막장'의 강도가 더욱 세지고 있다. 제작진은 주인공 보리의 '닥치고 박애정신'으로 조금이라도 '면피'를 해볼까 바라는 것 같지만 궁지에 몰린 연민정의 발악과 그 내용의 강렬한 전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민정을 맡은 이유리가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신들릴듯한 연기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섬뜩한 표정으로 간악한 모사를 꾀하고, 입만 열면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다가도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속절없이 철철 울고, 그러다가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이유리의 연기는 점입가경이다. 뒤로 갈수록 더욱 풍성하고 흥미로운 연기를 하고 있다. 특히 울다가 웃는 사이코패스 같은 연기는 압권이다. 유산한 후 오열하는 연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 막장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기자의 한없이 가볍고 엉성한 표변이 아니라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180도 변신을 이유리는 자유자재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 5일 그가 보여준 '광란의 밥 먹는 연기' 이른바 밥신은 15년 전 심은하가 '청춘의 덫'에서 보여준 그 유명한 밥신 이후 최고의 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는 홀로 키우던 딸을 사고로 잃은 후 정신줄을 놓다가 털고 일어나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 이 처연한 밥신은 두고두고 회자가 됐다. 이유리는 이날 두 차례 밥신을 선보였는데 둘 다 백문이불여일견이다. 하나는 재벌가 며느리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결정적 끈인 임신을 했다는 기쁨에 기고만장해서 토스트를 우적우적 사납게 먹는 장면이었고, 또 하나는 그 금쪽같은 태아를 유산해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시어머니 앞에서 비빔밥을 숨돌릴 틈 없이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장면이었다. 두 장면 모두 이유리는 입안 가득 음식을 밀어 넣은 채 대사를 주저리주저리, 명료하게 뱉어냈다. 동시에 웃다가 능청 떨다가 분노하는 감정연기를 소화해냈다. 형언이 어렵다. ◇ 송윤아·문정희 - 주거니받거니 시너지 효과 극대화 종영까지 4회 남은 '마마'도 그 내용은 새로울 게 없다. 전형적인 신파극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두 여주인공인 송윤아와 문정희의 내공이 흠씬 묻어나는 연기 덕에 시청의 몰입도를 높인다. 고생 끝 성공했지만 시한부를 선고받아 생때같은 아들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한승희와 그런 한승희가 사실은 자기 남편의 아이를 홀로 키워왔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온 마음을 다 줬다가 뒤통수를 맞은 서지은이 주고받는 감정과 이야기는 통속극의 상투성을 벗어난다.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라, 같은 재료라 해도 인물 속으로 들어간 배우의 연기가 어떠냐에 따라 신파극 연기도 예술의 경지가 될 수 있음을 송윤아와 문정희는 보여준다. 한승희로 분한 송윤아의 땅으로 꺼질 것 같은 차분하고 가라앉은 톤과 서지은으로 분한 문정희의 티없이 맑고 순수한 톤이 부조화 속 조화를 이루며 앙상블을 낸다. 실제 현실에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송윤아는 오랜만의 연기 복귀작에서 인생의 깊이가 한 뼘 깊어졌음을 연기에 녹여내고 있다. 위암 말기 환자의 신체적 고통과 세상에 홀로 남을 아들에 대한 애끊는 모정, 생전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 보인 친구 서지은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미안함이 모두 깊은 회한 속 절절하게 표현된다. 문정희는 구김살 없이 자라나 순진하고 애교가 넘치는 밝은 캐릭터에서 하루아침에 치욕적인 배신감에 휩싸이는 인물을 설득력있게 그리고 있다. 초반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줌마를 연기하며 디테일이 깨알같이 살아있는 연기를 펼치더니, 후반에는 배신감에 휩싸인 서지은의 심리 변화를 시청자가 마찰음 없이 따라갈 수 있게 이음새 없이 그 변화를 소화해내고 있다. 덕분에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인 한승희와 서지은이 서로에게 향해 보내는 애틋한 마음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시청자에게 전해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물들의 기막힌 사연과 처지가 이 두 배우를 만나 손에 쥘 듯한 생명력을 띠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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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시론> 담뱃값 물가연동제 앞서 해야할 일(서울=연합뉴스) 정부가 지난 11일 발표한 종합금연대책 가운데 담뱃값 인상의 핵심내용은 두 가지다. 일단 내년 1월 담뱃세를 2천원 올려 현재 2천500원인 담뱃값을 4천500원으로 올리고 담뱃세에 물가연동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담뱃세 인상안을 담은 국민건강증진법 등의 입법 예고를 통해 담배가격을 구성하는 담배소비세, 지방교육세, 건강증진부담금, 개별소비세 등을 30% 안의 범위에서 소비자 물가와 흡연율 등을 연동해 조정할 수 있다는 근거조항을 담았다. 정부는 이어 법 시행령을 통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기준점을 5%로 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한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5%에 도달하는 시점에 이를 반영해 담배가격을 올린다는 것이다. 물가 상승률을 2~3%로 가정할 경우 2~3년에 한번씩 200~300원 정도 오르게 될 전망이라고 한다. 물가상승률이 1.3%를 기록한 작년처럼 저물가가 이어지면 인상시점은 더 늦춰지는 방식이다. 담뱃세에 물가연동제를 도입하자는 논의는 몇 차례 있었다. 담배 관련세금에 물가연동제를 도입하는 의원입법안들도 나왔고 기획재정부도 작년 담배 세금ㆍ부담금 개편방안을 논의하면서 물가연동제를 검토한 바 있다. 정부는 우선 금연 효과의 지속성을 이유로 든다. 담뱃값이 오른 뒤 한동안 조정이 없으면 금연 효과가 떨어지지만, 물가연동제를 도입하면 담뱃값이 물가에 따라 계속 오를 것이라는 생각에 금연 효과가 지속되고 물가상승률이 일정수준에 도달하면 연동돼 가격 효과의 강도 역시 더 크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또 담뱃세 관련 법령들이 기획재정부, 안전행정부, 보건복지부 소관으로 나뉘어 담뱃세 인상을 위해 관련 부처가 각각 법 개정안을 내야하고 이 과정에서 논란이 증폭되는 등 담뱃값 인상에 어려움을 겪어왔다는 것이다. 한국 조세재정연구원은 물가상승률을 연 3%로 가정하고 담뱃세 인상ㆍ물가연동제 도입이 시행되면 10년 뒤 담배 한 갑이 6천 원이 넘고 담배소비량은 60%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흡연자가 금연을 결정할 정도의 가격 인상 후 물가연동제로 담뱃값의 점진적 인상을 유도, 금연 효과의 지속성을 확보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최초 담뱃세 인상 폭을 둘러싸고 세수부족에 따른 `우회 증세', 흡연율이 높은 서민층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서민증세'란 비판이 거세다. 담배 가격을 구성하는 세금ㆍ 부담금 (현재 62% 수준) 가운데 담배소비세ㆍ지방교육세는 지방재정으로 들어갔다. 비중이 늘어난 국민건강증진부담금 가운데 증액되는 금액은 최대한 금연사업에 쓰겠다고 밝혔지만, 지금까지 건강증진부담금으로 조성된 기금 가운데 연간 1.3%밖에 금연사업에 쓰이지 않았던 사례는 정부 스스로 이런 불신과 비난을 초래한 측면이 크다. 우선 국민건강증진기금 예산의 사용 분야를 목적에 맞게 법률로 규정해야 한다. 물가연동제의 적용 대상 세금 및 부담금의 용도 역시 최대한 국민의 건강증진에 쓰도록 하는 근거 규정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서민의 생활에 부담을 주는 가격인상수단인 만큼 재벌 등 부자감세 축소 등 조세의 공평성을 보여줄 수 있는 노력이 병행돼야 담뱃세 인상에 대한 불신과 비난을 해소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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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일본은 그토록 만만한가>소설가 유순하, 한일문화 비교한 '당신들의 일본'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중배 기자 = "내가 알고 있는 일본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데, 당신들의 일본은 그토록 만만한가?" "능력 있는 매는 발톱을 감춘다." (일본속담) '바보아재'로 최근 작품 출간활동을 재개한 원로소설가 유순하가 첨예화하고 있는 한일 갈등의 시대를 맞아 작심 에세이 '당신들의 일본: 한 몽상가의 체험적 한일 비교 문화론'을 펴냈다. 저자는 "전문가가 아닌 평균적 독서인의 관점"임을 내세웠지만, 구체적 사례에 근거한 한일 문화 비교를 통해 되돌아봐야 할 우리의 민낯을 상기시키는 통찰력은 예사롭지 않다. 저자의 집필 의도는 루스 베네딕트의 일본론 '국화와 칼' 구절에 녹아 있다. "적을 나쁘다고 철저하게 깎아내리는 일은 용이하지만, 적이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보는가를 적 자신의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해야만 될 일이었다." 그리고 말한다. "태산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칼을 갈아야 한다. (중략) 이를 위해서는 우선 상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기는 길에 들어서야 한다. 문제는 문화다." (18쪽) 이는 우리에게 내재한 무지와 자격지심에 대한 질타와 자성에 다름 아니다. 두루뭉술한 비평과는 질을 달리 하겠다는 작심이 곳곳에 배었다. 되살아난 황우석에 비해, 일본의 구석기 날조 사건의 당사자였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이후 완전히 묻혔다는 것. 지난 2006년 여기자 성희롱 사건에 연루된 당시 최연희 의원은 끝내 의원직 사퇴 등 요구를 묵살했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이후 어느 재벌회사 사장으로 영입되는 등 건재하지만, 같은 혐의를 받은 오카다 게이스케 도쿄 지바현 의원은 곧바로 의원직을 포기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학력에 대해 적잖은 공개적 조롱과 비판이 일었던 우리 사회와 달리, 이에 견줄만할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에 대해 적어도 일본 사회 내에서 학력을 놓고 일었던 논란이나 비판은 없었다. 그 차이는 바로 양국의 문화 차이로 인해 비롯된 것이며, 그 문화차이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현충원과 야스쿠니 신사를 비교하는 대목은 일본의 실체를 형상화해주는 요처다. 베트남전 참전자와 여순사건, 광주항쟁 등 희생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를 모신 현충원에 비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안장한 곳이다. 희생자 가족의 의전 중심인 현충원에 비해 야스쿠니는 범국민적 신앙의 대상이다. 현충일을 제외하곤 대개 한적한 현충원이지만, 야스쿠니는 언제나 붐빈다. 현충원은 우리 전통의 흔적을 찾기 힘든 현대식 건물로 지어졌지만, 야스쿠니는 입구부터 건물 곳곳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일본적이다. 또한 현충원엔 유물이 없지만, 야스쿠니엔 전사자의 옷과 일기에 이르기까지 전사자의 체취마저 느끼게 한다는 것. 요컨대 야스쿠니엔 일본 정신의 뿌리와 현재가 있다는 것이다. 유 씨는 야스쿠니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깔려 있는 잔자갈을 밟으며, 뼈를 갉아 내는 듯한 그 소리를 음미해보라"고 말한다. 이제 일본에 대한 '자격지심'을 던져버려야 할 때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로 통하는 1982년 서울 세계 야구선수권대회의 승리 후에도 우리는 일본과의 스포츠 대결에서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바로 지난해 6월, 미국 프로야구 LA다저스와 뉴욕양키스전에서 류현진과 구로다 히로키가 투수로 맞붙을 때가 그랬고, 개그맨 윤형빈이 여자 격투기 선수 임수정의 복수를 위해 이종격투기 경기에 나설 때가 그랬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류현진이 당시 패전한 것을 놓고, 우리의 모든 포털과 신문의 주요 기사엔 류현진과 구로다, 당시 류현진에게서 홈런을 뽑아낸 스즈키 이치로가 등장했지만, 당시 저자가 검색한 야후 재팬에선 '7승째를 거둔 구로다'라는 지지통신의 사진 한 장만 결과물로 나왔을 뿐이다. 유 씨는 최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서 일본 우익을 대변하는 논리를 펼친 '제국의 위안부'를 펴냈다고 해 논란을 빚은 세종대 박유하 교수에 대해서도 일본에서 연구한 이력을 감안할 때 스스로의 관점에 충실한 결과물일 뿐이라고 평했다. 문제는 우리 관점에서 본 일본사 연구가 빈약할 뿐 아니라, 일본 내 한국사 연구자 수가 국내 한국사 전공자 수도 능가하는 수준이라는 점에 있다고 꼬집었다. 소설가 유순하는 그간 삼성과 페미니즘 등에 직접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등 논란을 피하지 않는 작가의 길을 걸어왔다. 일본 태생이라는 점 등 때문에 작가적 성취에 비해 국내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고희에 이른 저자는 "새삼스레 무엇을 두려워하랴"며 앞으로도 우리 문화에 대한 비평과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 총 10권의 에세이를 펴내겠다고 말했다. 재선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서 처음으로 우리 정치에 대한 희망을 발견했다는 저자는 책 말미에 우경화하는 일본을 향한 직설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