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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없이 걷기 좋은 도심 속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수원화성 성곽길. (수원=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경기 수원시 장안구에 위치한 수원화성은 빼어난 절경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서울 근교의 역사 문화 답사지 중 인기가 높다. 코로나 19 확산 감염의 우려로 바깥 활동을 자제하는 시기, 날이 풀리며 자연과 어우러진 도심 주변을 찾아 산책에 나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조선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1796년 9월 완공된 성이다. 이곳은 유네스코도 인정한 정조의 효심과 기록 정신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서울 인근에 있다는 점과 걸어서 3시간 안팎으로 무리 없이 완주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성곽길 코스 덕분에 수원화성 성곽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수원화성 성곽길. 수원화성은 조선 시대의 개혁 군주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성곽으로, 우리나라 성관 건축 사상 가장 독보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축조 상황을 기록한 세계기록유산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1975년부터 보수·복원했다. 1997년에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수원화성은 수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길이는 약 5.7km로 성곽을 따라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동 창룡문, 서 화서문, 남 팔달문, 북 장안문으로 수원화성을 출입하는 4개의 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원 팔색길 화성 성곽길은 북문이라 불리는 장안문에서 시작한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장안문을 출발해 화성행궁까지 약 5km 정도 이어지는데, 성 내외를 구경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2시간가량 걸린다.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북포루. 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서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관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서북각루. 성곽을 따라 걷다 힘이 들 땐 서북각루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수원화성의 멋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효심과 애민정신이 지극했던 정조대왕의 숨결을 따라 성곽을 천천히 걸어보거나, 토목건축의 백미를 보여준 정약용의 빼어난 과학성에 집중해 봐도 좋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예술성과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더라도 하나로 이어진 길 위에서 색다른 멋을 즐길 수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사계절이 보여주는 그 풍경이 다 달라 산책 가족과 나들이하기에 적당하다. 특히,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만개하는 봄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코스 중간 팔달문 근처에서 만날 수 있는 지동시장에서 순대 등 다양한 먹거리도 만날 수 있다. 또한, 화서문에서는 요즘 핫하다는 행리단길을 만날 수 있다. 수원 문화 관광 해설사의 집에서 행궁길 및 수원 화성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소품샵부터 루프탑 카페까지 즐길 수 있다. 골목골목 숨어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카페와 소품샵들로 볼거리가 가득하다. 근처 젊음의 거리 행리단길에서 야경과 함께 인생 사진을 남겨보는 것도 추천한다. 수원 문화 관광 해설사의 집.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 투어. 한편, 수원시에서는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 투어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성곽길을 따라 주요 지점에 설치된 스탬프를 찍으며 총 5.9㎞ 성곽길을 완주하는 특별 체험 프로그램이다. 스탬프 북은 스탬프 함이 설치된 인근 안내소에서 받을 수 있다. 수원화성 성곽길 명소 11곳 중 8곳 이상 방문하여 스탬프를 찍으면 시에서 소정의 기념품을 지급한다. 눈부신 예술성과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성곽길도 구경하고 소정의 기념품도 얻을 수 있으니, 수원화성 계획이 있는 분들은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수원화성은 대한민국의 문화적 역량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우리의 자랑이다.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잘 가꾸고 보존하며 유지할지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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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읍성(邑城) 성벽 최초 확인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의 허가를 받아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에서 발굴조사하고 있는 “상주시 인봉동 35-5번지 유적(면적 233㎡)”에서 상주읍성의 성벽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번 발굴조사는 문화재청 문화재보호기금(복권기금)을 활용하여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진행 중인 「매장문화재 소규모 발굴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다. 발굴현장 공개는 30일(화) 오후 2시에 현장에서 개최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어 문헌 속에만 존재하던 상주읍성 상주읍성은 문헌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1385년(고려 우왕 11년)에 축조되어 일제(日帝)의 읍성 훼철령(1910년)에 따라 헐리게 되는 1912년까지 약 520년 이상 유지되었다. 고려말 왜구 침임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만들어진 읍성은 조선 초기에 경상감영(慶尙監營)을 둠으로써 당시 경상도의 행정·문화·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상주읍성은 지표조사와 연구를 통해 성벽의 위치에 대해 추정만 있었고, 그 실체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2019년 조사대상지의 북서쪽 40m 지점인 인봉동 73-7번지 유적에서 상주읍성의 해자(垓子)*가 처음으로 조사된 성과가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조사대상지가 일제강점기(1913년)에 제작된 지적도에 성도(城道)로 표시된 부분에 해당함을 현재 지적도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하였고, 바로 이 자리가 상주읍성의 북동쪽 성벽임을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밝혔다. 성벽 위치 최초 확인, 조선 전기에 축조한 성벽 기저부 잔존 성벽은 체성부* 아래의 기저부**만 확인되었다. 이는 1912년 일제의 읍성 훼철 당시 지상의 육안으로 보이는 성벽이 철거되고, 성벽 기저부 위쪽이 임시 도로로 사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당시 지적도 상에 ‘성도(城道)’로 표기한 연유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벽 위에 건물들이 건축되면서 기저부도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기저부의 규모는 길이가 760㎝ 정도로 조사대상지의 북쪽과 남쪽 조사 경계 밖으로 계속 연장되고 있다. 너비는 성벽 외벽 쪽인 동쪽 지대석에서 내벽 쪽인 서쪽으로 470㎝ 정도만 확인되었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높이는 40㎝ 정도만 확인되었으나 성벽 기저부를 견고하게 축조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대석은 가운데 부분이 유실되고 5매만 확인되었으며, 이 역시 조사 경계 밖으로 계속 연결되는 양상이다. 이와 별도로 성벽 동쪽의 일제강점기 건물지 지반 보강을 위하여 훼철된 성벽의 큰 성돌이 다수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축조시기는 성벽 기저부의 다짐층과 보강층에서 조선시대 전기 백자종지편이 출토되어 조선시대 전기로 판단된다. 향후 상주읍성 정비·복원을 위한 실마리 지금까지 상주읍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9년 해자 조사에 이어 이번 성벽 기저부 조사가 두 번째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번 한국문화재재단의 조사는 소규모 면적에 대한 성벽의 기저부 조사이지만, 문헌 기록으로만 확인되던 상주읍성 성벽의 실체와 위치를 정확히 찾았다는데 의의가 매우 크며, 이를 통해 향후 상주읍성 전체의 위치와 흔적을 찾고, 정비·복원을 위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본다. 30일 개최하는 발굴현장 공개는 코로나19와 관련한 생활 속 거리두기를 준수하기 위하여 발굴현장 공개 참석자들은 발열 확인과 손 소독제 사용,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여 방역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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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연말 종교계의 이모저모한교총, 12월 14일부터 ‘성탄 캐럴과 선물 나눔 캠페인’ 전개 (국민문화신문) 유석윤 기자=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코로나19에 지친 이웃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는 <성탄 캐럴과 선물 나눔 캠페인>을 14일부터 전개하였다. 이 캠페인은 전국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마음을 전하고, 온 성도가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캐럴과 선물을 이웃과 나누는 행사로 기획되어, 서울시향과 헤리티지 등이 제공한 음원으로 캐럴 영상을 만들어 14일부터 진행하였다. 전광훈 1심 무죄, 법원 "표현의 자유는 민주사회의 근간” 올해 4·15 총선을 앞두고 집회에서 사전 선거운동을 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전광훈(64)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허선아 부장판사)는 30일 전 목사의 공직선거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전 목사는 선고가 끝난 30일 오전 11시쯤,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 법원삼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죄 선고에 대한 심경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전 목사는 "대한민국이 이겼습니다"라고 두 번 외쳤다. "모든 과정 중에 저를 불법으로 조사한 경찰 수사관들, 무리하게 저를 괴롭힌 검사들을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며 "내 말이 좀 무리가 있다고 해도, 한기총 대표를 구속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했다. 국회 앞 성벽기도회 동성애 및 포괄적 차별금지법 개정반대 성벽기도회 ‘국회 성벽기도회’는 일사각오구국목회자연합의 주최로 2020년 7월부터 현재까지 매주 국회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본 성벽기도회는 “동성애 및 포괄적 차별금지법” 개정을 반대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일사각오구국목회자연합 윤치환 목사는 “동성애 및 포괄적 차별금지법” 개정 추진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아 받아들일 수 없고, 특히 민주당 이상민 국회의원의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이하, 이상민 법안)’을 발의하기 위한 행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동성애 및 포괄적 차별금지법 개정 법률안을 저지하기 위해 각 지역마다 현수막과 전단지를 만들어 함께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라고 호소했다. 한교총, 이상민 의원이 추진 중인 차별금지법안의 철회를 촉구 성명서 발표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왼쪽부터 소강석, 이청, 장종현)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소강석, 이 철, 장종현)은 “국회 이상민 의원이 종교계와 국민의 거듭되는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이하, 이상민 법안)’을 발의하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라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이상민 법안은 이미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발의하여 법사위 전문위원 검토에서 ‘부정 및 유보’ 의견으로 입법 필요성에 공감을 얻지 못한 ‘차별금지법안’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라며, “이 법안은 국민 다수가 동의할 수 없는 독소조항과 ‘포괄적으로 처벌하겠다’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초갈등사회를 가속화 할 과잉입법안이다”라고 말했다. [성명서 원문] <한국교회총연합 성명서> 대표회장(공동) 소강석 이 철 장종현 이상민 법안은 성적지향, 성 정체성에 따른 차별 등 21개 차별 사유에 대해 무차별적 제재를 가함으로써, 차별의 심각성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금지와 제재를 부여해야 한다는 법치주의 원리에 반한다. 우리는 이미 양성평등기본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개별적 차별금지법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또다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성 소수자, 종교 소수자 등의 보호를 위해 전체 국민의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독선적이며 역차별적인 법안이다. 이상민 법안은 남자와 여자라는 양성 이외에 제3의 성을 인정함으로써 양성평등을 기초로 한 헌법을 무력화함은 물론이며, 주민등록제도, 병역, 교육제도 등 기존 법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결과를 야기하며, 이로 인해 발생할 사회문화적 갈등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일방적 법안이다. 이상민 법안은 차별의 개념에 간접차별, 괴롭힘 등 주관적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국민 누구나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 뿐 아니라 상호 불신과 증오를 조장할 법안이다. 이상민 법안은 국가인권위원회를 범국가적인 차별시정의 무소불위한 최상위 기구로 격상시켜 권력분립 및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적 통치원리를 무너뜨리고 견제 불가능한 초헌법적 기관이 출현하게 함으로써 자유롭게 표현할 수조차 없는 통제사회로 만들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현재에도 오직 성 소수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비판조차 할 수 없는 구조를 조장하며, 동성애 보호가 인권 수호의 전부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만일 이 법이 통과될 경우 동성애에 대하여는 반대하거나 비판하면 처벌하는 조항을 통해 오히려 동성애를 조장하고 보호하며 동성애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상민 법안이 제시한 종교 예외규정은 종교에 대한 판단의 준거점을 사회상규에 둠으로써 정교분리원칙에 위반될 뿐 아니라 종교인과 비종교인, 그리고 이웃 종교 간의 또 다른 갈등과 불화를 일으키는 규정이다. 일반 국민이 신앙하는 종교는 각자의 삶의 판단 기준이 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된다. 이 법안이 신앙 행위를 종교시설 안으로만 국한하여 예외규정으로 넘어가려 한 판단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에 우리는 이상민 법안을 반대하며 자진 철회를 강력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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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오랜 세월 진주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아 온 진주성(晉州城ㆍ사적 제118호)은 서남쪽에서 동남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따라 높이 5∼8m, 길이 1천760m의 성곽을 두르고 있는 자그마한 성이다. 어둠이 깔리면 진주성과 촉석루는 황홀한 야경을 보여준다. [사진/전수영 기자]현재 역사공원으로 꾸며진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다. 처음 건립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며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이후 고려말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인 김중광이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했다. 이어 선조 24년(1591)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외성을 쌓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해 10월 진주성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3천800여 명의 군사로 2만여 명의 왜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은 왜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덟 달 뒤인 1593년 6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진주성으로 쳐들어왔다. 민ㆍ관ㆍ군 7만여 명이 왜구에 맞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장렬하게 순절했고 진주성은 함락됐다. 왜군은 승전을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 와중에 의기 논개는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장일영 문화관광해설사는 “진주성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진주대첩이 벌어졌던 격전지로 역사 현장학습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라며 “진주를 일컬어 약무진주 시무호남(若無晋州 是無湖南)이라고 말하듯 진주는 예로부터 남부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말한다.진주대첩이 벌어졌던 혈전의 현장인 진주성은 임란 이후 경상도 우병영이 위치했고, 해방 이후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행정기관이 소재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살았는데 1979년부터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 지금의 역사공원으로 조성됐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창렬사, 북장대, 서장대 등 진주성 전투를 돌이켜 생각해볼 만한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픈 역사를 품은 진주성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관광 100선에 3회 연속 선정됐다. 촉석루는 미국의 뉴스 전문채널 CNN이 선정한 ‘한국 방문 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공북문과 김시민 장군 동상◇ 왜적과 맞섰던 치열한 역사의 현장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나와 있는 진주성의 정문인 공북문(拱北門)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니 잘 꾸며진 잔디공원과 김시민(金時敏ㆍ1554∼1592) 장군 동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북문은 ‘북쪽에 있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고유(告由)하던 자리로 알려졌다.2000년 1월 1일 제막한 김시민 장군 동상은 높이 7m로 진주성 수호상이다. 시호는 충무(忠武)로 이순신 장군과 같다. 동상 앞 비석에는 “157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군기시 판관을 거쳐 1591년 진주 판관이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제를 갖추어 사천ㆍ고성ㆍ진해ㆍ지례ㆍ금산 등지에서 승전고를 올리며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5일 침공한 적의 2만 대군을 불과 3천800여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며 눈물짓다가 39세를 일기로 이곳 진주성에서 순절하였다. 슬프다! 장군의 천수가 꺾이지 않았던들 이듬해 6월 진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을까…”라고 적혀 있다. 김시민 장군 동상을 둘러본 뒤 성곽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가면 김시민 장군 전공비(경남 유형문화재 제1호)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김천일, 최경희, 황진 등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세워진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ㆍ경남 유형문화재 제2호)를 만난다. 옆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7만 민ㆍ관ㆍ군의 넋을 기리는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세워져 있다. 촉석루는 진주성을 휘감아 도는 남강과 어우러져 천하의 전경을 연출한다.임진대첩계사순의단에서 남강 쪽으로 내려가면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히는 촉석루(矗石樓ㆍ경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가 서 있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된 이래 수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듭한 촉석루는 ‘강 가운데 우뚝 솟아있다’는 의미로 ‘촉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쓰였고 평시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누대로 과거를 치르던 고사장으로도 사용됐다. 임진왜란 때 불탄 촉석루는 1948년 국보 제276호로 지정됐으나 6.25 한국전쟁 때도 불타는 불운을 겪은 뒤 1960년에 복원됐다.촉석루에 오르면 ‘북에 평양 부벽루가 있다면 남에는 진주 촉석루가 있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 옛날 진주성을 휘감아 도는 남강과 의암, 강너머 드넓은 모래사장, 초록빛 산과 탁 트인 하늘이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 문인 이인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으로 손꼽히는 ‘파한집’에서 “진주의 산수(山水)가 영남 제일”이라고 말했다. 시원한 강바람이 부는 촉석루에는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청천 신유한, 매천 황현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는데 너무 높이 걸려 있어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논개의 충절이 서린 의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촉석루에서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면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의암(義巖ㆍ경남 기념물 제235호)이라는 바위가 반긴다.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남강 수면 위에 솟아있는 바위 서쪽 면에는 인조 7년(1629) 정대륭이 쓴 ‘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논개가 낙화(落花)한 곳이라서 그런지 촉석루를 떠받치는 벼랑 만큼이나 크고 당당하게 느껴진다. 의암 바로 위에 세워져 있는 의암사적비에는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라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촉석루 옆에는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義妓祠ㆍ경남 문화재자료 제7호)가 있다.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과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 있다.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미모와 기예가 모두 뛰어난 진주기생 산홍은 내부대신이며 친일 앞잡이인 이지용이 첩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자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은 비록 천한 기생이라고 하나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며 꾸짖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촉석루보다 높은 지역에 있어 서쪽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좋은 서장대◇ 불빛과 물이 어우러진 황홀한 야경 의기사 바로 옆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ㆍ경남 유형문화재 제3호)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 순국한 성주목사 제말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흥록 장군의 충의를 새긴 비석이다. 쌍충사적비를 지나 성곽을 따라가면 진주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서장대((西將臺ㆍ경남 문화재자료 제6호)가 나온다. 절벽 위에 위치해 서쪽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좋은 지휘소로 남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회룡루(回龍樓)로 나오는데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이 다락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서장대는 1934년 한 독지가에 의해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목조기와 집이다.서장대 아래 위치한 호국사(護國寺)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근거지였으며, 창렬사(彰烈祠ㆍ경남 문화재자료 제5호)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충민사에 모셔져 있던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38명의 신위를 모신 사액(賜額) 사당이다. 사당 내에는 임금이 지어 내린 제문의 비각이 있다. 선조 40년에 건립된 사액사당인 창령사 창렬사를 나와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천자총통ㆍ지자총통ㆍ현자총통이 설치된 포루를 만난다. 진주성 내성에는 3곳, 외성에는 9곳 등 총 12좌가 있었으나, 상징적으로 한 곳만 복원했다. 팽나무와 느릅나무가 하나로 붙어있는 연리나무를 지나면 북쪽 지휘소인 북장대(北將臺ㆍ경남 문화재자료 제4호)에 닿는다. 진주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성내는 물론 외성의 군사까지 지휘할 수 있었다. 진남루(鎭南樓)라고도 부르는 북장대에 오르면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북장대에서 성벽을 따라가면 공북문이고, 성 중심부로 내려오면 조선 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인 영남포정사(경남 문화재자료 제3호)가 눈에 띈다. 문루 앞에는 ‘수령 이하의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표석인 하마비가 있다.진주성 내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인 진주국립박물관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임진왜란실은 전쟁의 발발, 일본군 전략, 조선의 대응(의병과 수군의 활약), 명군의 참전, 정유재란과 종전 등의 주제로 나누어 전쟁의 큰 흐름을 보여준다. 김시민선무공신교서(보물 제1476호), 천자총통(보물 제647호) 등 다양한 유물 관람은 물론 진주성의 역사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진주국립박물관 내 임진왜란실 진주성의 또 다른 매력은 야경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진주성 건너편 중앙광장에 서면 진주성벽과 촉석루는 화사한 불빛을 받아 황홀한 경치를 보여준다. 바람에 일렁이는 남강 물결 너머 촉석루의 처마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조명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 성안으로 들어가 은은한 불빛을 따라 느릿느릿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왜적과 맞섰던 치열한 역사의 현장, 천지사방이 적요했고 남강의 물결은 더없이 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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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멋따라> '숨비소리 길'에서 해녀 숨결 느끼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될 제주해녀문화 곳곳 산재 제주 바닷가에는 휘파람이 끊이지 않는다. 휘파람이 들려오는 곳에는 어김없이 해녀가 있다. 해녀들이 내는 '숨비소리'다.숨비소리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해서 나오는 동안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 소리다. 심연에서 내오는 애절하고도 원초적인 소리다.여행자에겐 언뜻 새소리처럼 들리는 숨비소리엔 해녀들의 삶이 녹아 있다.해산물 채취하고 올라오는 해녀(제주=연합뉴스) 제주 해녀가 깊은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한 뒤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2016.11.26 [제주해녀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숨비소리 길' 걷기 지난 22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실해진 제주해녀문화를 엿볼 수 있는 '숨비소리 길'을 찾았다.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출발했다. 박물관을 왼쪽에 끼고 동쪽으로 넘어가 세화축구장을 지나자 제일 먼저 '삼싱당'이 눈에 들어왔다.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삼싱당은 '여씨할망당'이라고도 한다. 세화리 면수동 마을 한가운데 있는 나지막한 동산인 '금산'에 있다고 해서 '금산당'이라고도 부른다.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제단을 만들어 '여씨할망신위'를 모셨다고 한다.이 마을 해녀를 비롯한 주민은 정월 12일 대제, 2월 12 영등맞이, 7월 12일 백중맞이, 10월 12일 시만국대제를 각각 지내며 각 가정의 무사안년을 기원한다.삼싱당에서 나와 제법 큰 팽나무들이 있는 면수동마을회관 사거리에서 다시 올레 21코스 표시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이웃 마을인 하도리의 별방진까지 가는 약 2㎞의 길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그리 넓지 않은 무밭들이 쭉 펼쳐졌다.해녀들의 안전 조업을 빌었던 삼싱당(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제주해녀박물관 인근에 있는 삼싱당. 해녀와 마을 주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당이다. 2016.11.26 khc@yna.co.kr 물때가 맞을 때는 바다로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고 물질하지 않는 날에는 밭에서 농사를 짓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삶을 사는 해녀들의 모습이 그려졌다.별방진(別防鎭)은 조선시대 군사진영으로, 제주도 기념물 제24호다. 중종 5년(1510)에 제주목사 장림이 성을 쌓고 김녕읍에 있던 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겨 '별방'이라고 지었다. 하도리보다 더 동쪽에 있는 우도를 근거지로 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 성의 총 길이는 1천8m이고, 높이는 3.5m다.남쪽 성벽 위로 올라가니 성 안팎의 집들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마을을 지나 북동쪽 성벽으로 올라갔다. 하도리 포구에 세워놓은 'Hado'라는 영어로 된 하얀색 구조물이 눈길을 끌었다. 성벽 밖 바로 밑에는 옛 주민들이 먹었을 맑은 용천수도 보였다.왜적의 침입을 막았던 별방진(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해안에 쌓은 별방진 성벽. 2016.11.26 khc@yna.co.kr 마침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날이라 바닷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얼른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와 해안도로를 따라 서문동 해안가의 원담을 보러 갔지만 아쉽게도 바닷물이 너무 많이 들어 볼 수 없었다. 원담은 밀물 때 들어왔던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잡으려고 해안가 얕은 바다에 원형으로 쌓은 돌담이다.깊게 눌러 쓴 모자도 날아갈 것 같은 북서풍을 가르며 서동 불턱을 찾았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다. 옛날 같으면 주변 나뭇가지 등을 주워다가 불을 피워 몸을 덥히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해녀들을 볼 수 있으련만 지금은 추억의 장소가 됐다. 현재는 어촌계마다 탈의실과 보일러가 있는 욕실, 작업장 등을 갖춘 현대식 해녀탈의장을 갖추고 있다.서동 불턱 인근에는 '환해장성(環海長城)'이 있다. 고려시대 몽골항쟁과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도 해안선 300여리(약 120㎞)에 쌓았다고 전해진다.해녀들의 쉼터 불턱(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제주 해녀들이 불턱에 모여 앉아 담소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16.11.26 << 제주해녀박물관 제공 >>주변에는 화산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공기에 닿아 굳으면서 생긴 '튜물러스(Tumulus)'란 용암지형과 산림청 보호식물로 지정된 '모새달'이란 식물, 피부의 염증성 질환과 피부 병원균 생장 억제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염생식물 '큰비쑥' 등이 보였다.이 길에 있는 유일한 절인 용문사와 면수동 주민의 옛 식수였던 '만물'을 지나 이내 해녀박물관에 도착했다. 길이가 4.4㎞로 1시간 30분 걸린다지만 2시간이 걸렸다.박물관 1층 카운터에서 표를 끊고 해녀의 삶을 다룬 제1전시실로 들어갔다. 전형적인 제주 초가와 부엌, 밥상은 물론 식수를 길러 다닐 때 사용했던 허벅, 차롱, 애기구덕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둘러봤다.해녀의 일터를 보여주는 2층 제2전시실에서는 해녀들이 불턱에 모여 앉아 담소하는 모습을 재연한 전시물과 물질하는 하는 영상, 물질 때 사용하는 물안경, 비창, 까꾸리, 작살, 테왁 등이 눈길을 끌었다. 옛 해녀들이 입었던 광목으로 만든 '물소중이'와 현재의 잠수복인 고무슈트도 대비해 놓아 해녀 의복의 변천사를 가늠케 했다. 해녀 공동체와 공동체 내의 위계질서에 대한 설명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3층 전망대에 올라서니 세화리 마을과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2층에서 1층 제3전시실로 내려오는 통로에는 옛 제주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때의 명칭과 바람의 명칭, 해녀들이 채취하는 해산물과 채취 시기 등에 설명이 붙어있다. 해녀의 생애를 다룬 1층 제3전시실에선 해녀들이 직접 들려주는 삶의 기억을 담은 영상물들을 시청했다.어린이해녀관은 '제주해녀 수애기'의 이야기를 다룬 3D 애니메이션, 어린이 숨 참기, 망사리 시소와 저울, 재미있는 고망낚시, 해양쓰레기 등을 보여준다.제주해녀박물관 전경(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 전경. 2016.11.26 khc@yna.co.kr 숨비소리 길은 제주 해녀문화를 파악하기 가장 좋은 길이다. 마침 겨울이어서 해녀를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박물관이 있어 아무 때나 와도 해녀문화를 살펴보기에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해녀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자 날은 거의 저물었다. 오후 2시 50분께 도착해서 숨비소리 길을 걷고 박물관을 둘러보는 데까지 3시간 정도 소요됐다.제주해녀문화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리는 제11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 간 위원회(무형유산위원회)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될 예정이다.◇ 교통편·탐방시간·주변 관광지·먹을거리 제주공항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가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세화·성산 방면 701번 시외버스를 타고 달리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면 2시간이 조금 넘게 소요된다. 자가용으로는 제주공항에서 출발해 1시간 정도면 도착한다.제주해녀박물관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다만 관람 시간을 고려해 오후 5시 10분까지 표를 끊어야 한다. 숨비소리 길은 정해진 탐방시간이 없으므로 아무 때나 걸어볼 수 있다.주변 관광지로는 비자림과 돌 미로 공원인 메이즈랜드, 나무 미로 공원인 김녕미로공원, 만장굴, 제주레일바이크, 성산일출봉 등이 있다. 제주해녀박물관 주변에 나름대로 특색을 살린 카페, 식당, 횟집, 민박들이 줄지어 있다. 10분 거리에 세화민속오일장도 있다. 세화민속오일장은 끝자리가 '0'이거나 '5'인 날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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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역사와 자연미를 품은 고창읍성(고창=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고창읍성은 평지에 쌓은 낙안읍성, 해미읍성과는 달리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해 바깥쪽만 돌을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읍성은 높이 4~6m 성곽이 1.7㎞ 정도 동그랗게 둘러친 형태로, 동문 등양루(登陽樓)·서문 진서루(鎭西樓)·북문 공북루(拱北樓) 등 문 3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甕城) 3곳, 성벽 바깥쪽으로 쌓은 치성(雉城) 6곳을 만들었다. 600여 년 세월 동안 수많은 풍상을 이겨낸 고창읍성은 성곽 그 자체도 예쁘지만, 밤이면 조명을 받아 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사진/전수영 기자 읍성에 옹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인데, 자연석을 틀에 알맞게 쌓아 올린 성은 옛 나주 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돼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세월에 닳았어도 원형은 그대로인 성벽은 대부분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굄돌을 넣는 방식으로 쌓았으나, 주춧돌이나 절집의 당간지주도 섞여 있다. 조선시대 읍성은 대체로 관민이 함께 생활한 곳이었으나, 고창읍성은 야산과 좁은 골짜기로 되어 있어 평소 백성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웠다.고창읍성이 언제쯤 세워졌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성벽에 새겨진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라는 표석으로 미루어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한충호 문화관광해설사는 “공사구간마다 동원된 장정의 고을 이름이나 감독자의 이름을 새긴 돌이 바로 표석”이라며 “이는 공적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사를 허술히 해 무너지는 경우엔 책임을 묻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고 말한다.1965년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고창읍성은 모양성(牟陽城)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성이다. 백제 때 고창 지역을 ‘모량부리’(牟良夫里)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관아건물 22동이 있었으나 크고 작은 전화(戰禍)로 소실됐다. 1976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동헌, 내아, 객사 등 건물 14동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사진/전수영 기자◇ 성곽 길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읍성 매표소를 지나면 고창읍성 성 밟기를 형상화한 아낙네 동상과 읍성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는 수령들의 공덕비와 마주한다. 한충호 문화관광해설사는 “고창읍성을 부녀자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곳의 성 밟기는 작은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것이 특징”이라며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에 간다”고 말한다. 북문인 공북루에 들어서면 울창한 숲과 옛 건축물들이 펼쳐지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세월의 흐름이 멈춰버린 옛 풍경 속으로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 든다. 고창읍성처럼 북쪽이 낮고 동쪽과 남쪽이 높은 지형에 쌓았을 경우에는 자연히 북쪽에 정문을 낼 수밖에 없다. 대부분 관아의 북문 명칭인 공북루란 성안을 들고 날 때 한양의 임금님 덕을 기린다는 의미다. 사진/전수영 기자 공북루는 주춧돌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는데 주춧돌 높이는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기둥이 땅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다. 성문 앞 옹성 위에는 군졸들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흘려 적의 접근을 막는 현안(懸眼)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銃眼)을 설치했다.공북루 왼쪽으로는 죄수를 가두던 옥사가 있고, 오른쪽으로 쇄국정책을 내세웠던 대원군이 1871년에 세운 척화비가 지금까지 서 있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라는 뜻이다. 척화비 뒤쪽으로는 지방민을 대표해 수령을 보좌하는 향청이 복원돼 있다. 조선 초기에는 유향소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이라고 불렸다.읍성의 큰 도로 가운데에 2층 누각인 풍화루가 들어서 있다. 독립된 건물이면서 객사나 동헌의 외삼문 역할을 한 이곳에서 예전에는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의 현판 ‘풍화루’(豊和樓)는 독특한 서예 세계를 보여준 석전 황욱(1898∼1993) 선생이 92세에 쓴 글씨다.풍화루의 오른쪽 언덕 위에 동헌과 내아가 있다. 동헌은 지방 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 건물로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뉜다.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 불렀다. 동헌 정면에는 당(堂)이나 헌(軒)등의 현판을 걸었는데, 고창읍성 동헌 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平近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전수영 기자 동헌에서 서문인 진서루 쪽으로 가면 적게는 50년, 많게는 수백 년 수령의 적송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게 자리 잡은 솔숲이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지난 2008년‘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수상한 솔숲에는 하늘을 향해 용트림하는 아름다운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소나무 내음을 따라 걷다 보면 대나무 숲이 발길을 머물게 한다. 1938년 청월 유영하 선사가 보안사(普眼寺)를 창건한 뒤 절집의 운치를 돋우기 위해 심었다는 맹종죽림(孟宗竹林)이다. 영화 ‘왕의 남자’ 와 ‘관상’이 촬영된 이 대숲의 맹종죽은 일반 대나무보다도 몸통이 굵고 키가 크다. 하늘을 찌를 듯 기다란 대나무들이 바람결에 춤을 추고, 온 마음은 죽향(竹香)에 물든다. 정신은 청아해진다.맹종죽림에서 나와 동쪽 오솔길로 걷다 보면 읍성에서 가장 큰 건물인 객사와 마주친다. 객사 중앙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린 곳이고, 왼쪽과 오른쪽 방은 사신이나 출장 온 관원들이 머물던 숙소다. 객사 뒤편 언덕에는 읍성의 수호신이자 고을의 수호신인 성황신을 모신 성황사가 있다.객사를 내려오면 관청(官廳)과 작청(作廳)이 있다. 지방 관아의 주방을 관청이라고 했는데 고을 수령과 그 가족의 식생활, 공사 빈객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회계 사무를 관장하던 곳이다. 고창읍성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고창여자중학교가 있었던 작청은 지방 관아의 육방 가운데 우두머리인 이방이 근무하던 이방청이다. 사진/전수영 기자 공북루에서 성곽 위에 올라 폭 1m 안팎의 성벽을 걷기 시작하면 한 시간에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성곽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히 반복된다. 성 밖에서 보면 성벽이 높지만 안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다. 동서남북의 풍광도 제각각이다. 성벽 길을 자분자분 걷다가 문루나 치성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본 고창읍내와 탁 트인 들판의 풍광이 일품이다. 고창 주민들은 ‘마실가듯’ 아침저녁으로 산책 삼아 성을 돈다.고창읍성은 오래된 성벽이지만 모양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아이들에게 우리의 옛 문화재를 보여주며 공부를 시킬 수도 있는 나들이 코스다. 매년 음력 9월 9일(중양절) 전후로 모양성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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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역사 사진으로 만난다-‘수원화성 어제와 오늘’수원시가 오랫동안 보관해온 수원화성 옛 모습 사진을 꺼내 수원화성 방문의 해 방문객들에게 사진전으로 수원의 역사를 보여준다. 시는 수원화성의 옛 사진과 현재의 사진을 비교 전시하는 기획사진전 ‘수원화성 어제와 오늘’을 9일부터 시청 로비에서 개최한다고 3일 밝혔다. 전시에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누각이 사라진 장안문과 화려하게 다시 태어난 현재의 장안문 등 수원화성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사진 60점이 전시된다. 70년대 팔달문 옆에 예비군과 학생들이 줄지어 서 민방공 훈련을 하던 사진과 행인들이 즐겁게 걸어 다니는 같은 장소 모습이 비교되고 방화수류정 옆 피난민의 판잣집이 즐비하던 모습과 현재 공원으로 정비된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팔달문에서 매교에 이르는 길에는 초가가 가득했으나 현재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고 옥수수, 깨 등 채소를 재배하던 화서문 성벽 터는 장안공원으로 바뀌었다. 옛 사진은 일제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관광, 또는 도시행정 등 기록에 필요해 촬영된 것이고 현재 사진은 시 공보관에서 과거 사진과 같은 앵글을 찾아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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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① 비단 물결 따라 짚어가는 백제의 향취(공주·부여=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백제,/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금강,/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 중에서 금강(錦江)은 전라북도 장수군 신무산의 뜸봉샘에서 시작해 무주, 옥천, 대전, 공주, 부여, 강경, 군산 등을 거쳐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394.79㎞의 길이, 천 리의 물길은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다. 즉 상류에서부터 적득진강·차탄강·화인진강·말흘탄강 등으로 부르고,공주에 이르러서는 옹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으로 부른다. 사진/이진욱 기자 인류의 문명이 갠지스강이나 유프라테스강 또는 황허(黃河) 유역에서 발달했듯이, 남한에서는 한강과 낙동강 다음으로 긴 강인 금강의 물줄기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고, 그 유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서로 기대며 살고 있다. 금강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최적의 삶의 터전이었다. 금강과 접한 산의 완만한 경사면이 만나는 지대에 위치한 공주시 장기면의 석장리에는 약 1만년 전 구석기인이 살았다. 사적 334호로 지정된 석장리 유적지에서는 깬석기, 밀개, 긁개, 찍개, 찌르개, 주먹도끼 등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돼 그 시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전기, 중기, 후기의 유적층이 다 있을 뿐 아니라 약 2만5천 년에서 3만 년 전 집터도 발견됐다.유적 내 석장리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 박물관으로 석장리 유적을 발굴, 전시하고 있다. 구석기 인류의 진화 과정,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구석기인의 생활 모습, 석장리 유적의 발굴 과정이 차례로 이어진다. 박물관 외부에는 구석기인의 생활상을 담은 선사공원과 발견된 집터를 토대로 막집을 복원한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가 있다. 사진/이진욱 기자◇ 금강을 끼고 쌓은 천혜의 요새 공산성 석장리 유적지에서 금강이 흐르는 쪽으로 내려오면 금강을 끼고 쌓은 천혜의 요새 공산성(公山城)이다. 웅진 시기(475∼538) 백제의 왕궁이었던 공산성은 해발 110m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성곽의 총 길이는 2천660m이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위례성 침범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공주의 옛 지명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고, 웅진은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60여 년 동안 백제 왕국의 중심이었다. 비록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공주까지 내려왔지만, 차령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인 공주는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천혜의 방어벽을 갖추었다. 또 백제와 긴밀한 관계의 지방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왕권이 약하여 혼란이 거듭되었으나 무령왕대부터 안정을 되찾고 백제의 중흥을 일궜다. 공산성 내에서 확인된 다량의 기와, 연꽃무늬와 바람개비무늬로 장식된 와당, 중국제 자기는 백제 시기 공산성의 위상을 짐작게 하는데, 문화와 교류 강국이었던 백제의 개방성과 국제성은 서해로 연결되는 금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진/이진욱 기자 공산성에는 네 개의 문이 있는데, 공산성을 일주할 때는 푸른 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 석축을 쌓아 올려 공산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서문의 금서루를 출발지로 삼는다. 금서루에서 금강이 흐르는 왼쪽으로 걸어가면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공북루가 나온다. 누각에 오르면 공산성을 휘감아 돌아가는 비단 물결과 ‘강물을 끌어당기는 누각’이란 뜻을 지닌 만하루(挽河樓), 성벽을 따라 노란색 바탕에 백호·주작 등이 그려진 깃발, 공주 신시가지의 고층 아파트, 1933년에 놓은 금강교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하루는 금강 쪽을 지키는 군사적 기능과 금강의 경승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누각으로 뒤쪽에는 연못과 임진왜란 때 승병 훈련소로 사용되었던 영은사가 있다.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1천500년 전 고대 왕국 백제의 향취가 가슴속 깊이 전해져 온다. 조선 시대 이괄의 난 당시 인조의 피란한 역사를 품고 있는 쌍수정 아래는 옛 백제 왕궁지로 추정하는 너른 터와 인공 연못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았다”고 기술돼 있다. 밤에 조명이 켜지니 은은한 불빛을 받은 성곽이 금강에 반영되고, 성 건너편 둔치에서 바라보는 공산성 야경은 마치 용 한 마리가 누워 있는 모습이다.공산성에서 금강 쪽으로 1.5㎞ 정도 가면 곰이 뛰어놀았다고 해 ‘곰나루’라는 뜻을 가진 고마나루가 나온다. 공주는 옛날엔 우리말로 고마나루라 부르고 웅진(熊津) 등으로 적었는데, 고려 태조 때 공주(公州)가 됐다. 고마나루는 금강을 오가던 배가 사람과 물자를 부렸던 가장 큰 나루터였다. 이곳에는 공주의 대표 전설인 인간을 사랑한 곰의 슬픈 이야기인 ‘곰나루 전설’이 서려 있다.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 터와 곰을 모신 곰사당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서쪽으로 흐르는 금강이 방향을 갑자기 꺾어 남쪽으로 흐르는 곳으로, 금강변의 넓은 백사장과 솔밭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백제의 흥망을 지켜본 부소산성538년 백제 성왕은 왕국의 미래를 기약하며 농경에 유리하고 외침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사비(부여)로 천도한다. 공주에서 35㎞ 남서쪽에 있는 부여는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뜻으로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또한 멸망의 처절한 아픔을 맞았던 고도다. 성왕은 부소산 일대를 중심으로 철저한 계획을 통한 도읍을 건설했다. 백제의 마지막 왕성인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띠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성 앞의 관북리 유적은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며 건물터, 공방시설, 도로, 연못 등이 확인됐다.백마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부소산성에는 백제의 마지막 숨결이 곳곳에 스며있다. 해발 106m의 나지막한 구릉인 부소산의 정상부에 쌓은 부소산성에는 백제의 마지막 충신 성충과 흥수, 계백의 영정을 모신 삼충사,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고나 피란 시설이 있었던 군창터, 땅을 파고 생활하던 수혈 주거지, 사자루, 반월루, 부여 동헌과 객사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사진/이진욱 기자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백마강가에 서 있는 높이 40m의 절벽인 낙화암이다. 사비도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됐을 때 삼천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 정상에는 죽은 궁녀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자 백화정이 있고, 낙화암 절벽 아래에는 아담한 절고란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고란사에서 목을 축이고 매표소로 다시 나오거나 바로 옆 나루터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에서 낙화암을 감상하고 구드래나루터로 갈 수 있다. 부소산성과 삼천궁녀, 그 이름만으로도 백제의 희미한 숨결이 느껴진다. 사진/이진욱 기자 경주 동궁과 월지보다 먼저 만들어진 부여 궁남지는 궁궐 남쪽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삼국사기’는 “무왕 35년(634년)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 끌어들였다”고 전한다. 패망한 백제의 수도 부여의 궁남지는 여름이면 홍련, 백련, 수련 등 갖가지 연꽃을 활짝 피워낸다.아름다운 경관과 나라 잃은 슬픔이 곁들여져 있는 공산성과 부소산성을 돌아본 뒤 금강 변에 있는 청벽산(277m)에 오른다. 폭 100m, 높이 25m의 거대한 바위 절벽 위에 있는 금강 조망 포인트에 서면 발아래로 굽이굽이 도도히 흐르는 금강의 장쾌한 풍광이 펼쳐진다. 강물은 쉼 없이 흘러가고, 강과 산을 물들이는 해넘이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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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서 관청 추정 통일신라 건물지군 확인2천585㎡ 부지 안팎에 건물지 14개…토제벼루 50여점 출토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의 천년왕성인 경주 월성(月城, 사적 제16호)에서 관청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건물지군이 확인됐다.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3월부터 월성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해 중앙의 C지구에서 담으로 둘러싸인 동서 51m, 남북 50.7m, 면적 2천585㎡인 정사각형 부지 안팎에 있는 건물지 14개를 찾아냈다고 30일 밝혔다. 월성 C지구에서 나온 건물지군. [문화재청 제공]이곳에는 본래 정면 16칸, 측면 2칸 규모의 대형 건물을 포함해 건물 6동만 있었으나, 후대에 동쪽과 서쪽 담을 허물고 건물 8동을 증축한 것으로 드러났다.건물과 담의 건축 시기는 인화문(도장무늬) 토기와 국화형 연화문 수막새 등 출토 유물을 통해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됐다.이번 조사에서 특히 관심을 끈 유물은 흙으로 만든 토제벼루 50여점이다.연구소는 월성 주변에 있는 동궁과 월지, 분황사에서 나온 토제벼루보다 양이 훨씬 많다는 점으로 미뤄 이번에 발굴된 건물지군이 문서를 작성하는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월성 C지구 출토 C지구 출토 벼루 다리편. [문화재청 제공]월성 C지구에서는 '정도'(井桃), '전인'(典人), '본'(本), '동궁'(東宮)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와 암막새 등 기와류, 다량의 토기도 출토됐다.전인은 궁궐 부속 관청인 와기전(기와나 그릇을 굽던 관아)에 속한 실무자, 본은 신라 정치체제인 육부 중 하나인 '본피부'(本彼部), 동궁은 태자가 머무는 궁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또 연구소는 탐색조사를 통해 월성 C지구에 통일신라시대 문화층(특정 시대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층) 2개와 신라시대 문화층 5개가 있다는 사실을 규명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현재까지 확보된 유물 분석자료를 보면 월성은 4∼9세기에 왕궁 또는 관련 시설이 있었으며, 신라가 멸망한 뒤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월성 C지구 출토 명문기와와 막새. [문화재청 제공]한편 지난해 하반기 조사를 시작한 월성 서쪽 A지구에서는 8세기 전후에 성벽이 보수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구간에 조선시대 이후 작은 자갈을 깔아 조성한 폭 3m의 통행시설도 발견됐다.나아가 서쪽 성벽 안쪽의 평탄한 땅에서는 지금까지 출토된 적이 없는 용도 불명의 특이한 기와가 나왔다.이 기와는 신라가 처음 기와를 사용한 6세기 전후에 제작된 무문(無文·민무늬) 암막새와 비슷하나, 제작 기법이 달라 주목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월성은 제5대 파사왕 22년(101) 축성을 시작했으며, 신라가 망한 935년까지 궁성으로 쓰였다.문화재청은 지난 2014년 12월 개토제를 시작으로 3개월간 시굴을 한 뒤 지난해 3월 본격적인 발굴에 돌입했고, 20만7천㎡ 면적의 월성을 A∼D지구로 나눠 발굴하고 있다. 현재는 C지구와 A지구의 성벽, 문지를 조사하고 있다. 경주 월성.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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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순천=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정겨운 고샅길을 걷다 보면 담 너머로 ‘고향 집의 정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낮은 담장과 사립문 사이로 보이는 마당가에는 조그만 장독대가 있고 마당 한쪽엔 채소밭이 있다. 양지바른 처마 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시래기와 메줏덩어리, 곶감 꾸러미 등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 정경에 쏠려 자신도 모르게 사립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지만 가옥 대부분이 개인 소유이다 보니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고 집안 구경을 해야 한다. 채소밭에서 일하던 한 주민은 “살고 있는 집에 불쑥불쑥 들어오는 탐방객 때문에 불편할 때도 있다”면서 “마을 사람 대부분이 전통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산다”고 말한다. 사진/이진욱 기자 한 해 90여만 명이 찾는 낙안읍성(樂安邑城)은 순천 시내에서 18㎞가량 떨어져 있는 옛 읍성으로 성벽이라는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도시이자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도시였다. 일반적으로 읍성은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산등성이에 축성하는 것이 보통인데 낙안읍성은 평지에 축성된 야성이다. 낙안은 평야가 많아 고려 시대 말엽 이후 왜구들의 침략이 매우 극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진/이진욱 기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성내에 98세대 2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낙안읍성은 국내 읍성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낙안읍성은 진산인 금전산(667.9m)을 북에 두고, 동쪽 오봉산(591.5m)을 우 청룡으로, 서쪽 백이산(584.3m)을 좌 백호로 삼았으며 남쪽엔 제석산(563.3m)과 안산인 옥산(97m)이 있다. 성벽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길이가 남쪽 약 460m, 북쪽 340m, 동쪽과 서쪽이 모두 약 310m이며 성벽의 둘레는 약 1천410m이다. 성곽 서북쪽에 조그만 구릉과 대숲이 있어 서북풍을 막아준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4∼5m이다. 사진/이진욱 기자 동문으로 들어가 객사와 동헌을 둘러보고 낙민관자료전시관을 거쳐 읍성의 일반 주민이 이용하는 서문 쪽에서 석성에 올라 성벽 위의 좁은 길을 따라 남문까지 걸어본 뒤 마을로 내려와 고샅길을 걸으며 중요민속자료 가옥을 둘러보고 짚 꼬기와 길쌈 등을 체험하면 제대로 읍성을 돌아보는 것이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조선시대 일반 읍성이 남문을 이용한 데 반해 낙안읍성은 지리적 여건상 낙풍루(樂豊樓)라고 부르는 동문이 정문 격이다. 문루는 2층 다락으로 되어 있고 드나드는 문은 삼문으로 되어 있다. 동문 앞에는 조그마한 석구(石狗·삽살개) 3기가 세워져 있고 일종의 방어시설인 해자와 평석교가 놓여 있다.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평석교 위에 걸터앉아 놀기도 하고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면 나이 숫자대로 다리 건너기를 하였는데 이를 다리 밟기(탑교놀이)라고 한다. 동문을 들어서면 읍성 안길이 서문 쪽으로 널찍하게 일직선으로 나 있고 길 오른편으로 관아, 왼편으로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낙안읍성은 산을 배경으로 그 앞에 관아가 형성되고, 관아 앞으로 백성들의 살림집이 들어서는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고을 경관이다. 사진/이진욱 기자 낙풍루에서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임경업 군수 선정비가 있다. 비각은 팔작지붕의 대문을 갖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귀신, 비신, 이수의 격식을 갖춘 비석에서 임경업 장군에 대한 백성의 흠모를 느낄 수 있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임경업 장군이 하룻밤 사이에 쌓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1397년 낙안 출신의 수군절제사 김빈길이 주민을 동원해 토성을 축조했다. 그 뒤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1626∼1628)로 봉직하면서 토성을 석성으로 중수하고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선정비 바로 앞에는 객사로 들어가는 홍살문이 설치돼 있다. 객사 입구에 홍살문을 세워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도록 하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도 있으며 하마비가 있어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도록 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 자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闕) 자가 새겨진 두 개의 나무패를 모셔 두고, 군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여기에 대고 배례를 올렸다. 또한 중앙에서 관리가 출장을 오면 이곳에서 거처했다. 요즘의 영빈관과 같은 곳이다,객사를 나와 광장을 거쳐 동헌까지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조형물 포졸들이 지키고 있는 동헌에 들어가면 앞마당 양쪽에는 형틀과 곤장을 때리는 장면의 모형이 설치돼 있다. 용인 민속촌도 아니고, 고즈넉한 읍성 분위기와는 다소 어긋나는 느낌이다.동헌 사무당(使無堂)은 군수, 현령 등 지방관이 주재하며 향리를 거느리고 공무를 보던 지방관아 건물이다. 뒤로는 진산인 금전산 자락에 안긴 듯하고 남쪽으로 안산인 옥산을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사진/이진욱 기자 동헌 앞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낙민루(樂民樓)가 있다. 이 누각은 낙안의 군수였던 민중헌(1845~1847년 재임)이 지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불탔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장현주 문화해설사는 “수령이 동헌으로 출근하기 전에 높은 누에 올라 간밤에 백성들이 별일 없이 잘 지냈는지 길에 오고 가는 백성들의 얼굴을 살펴보고, 집집이 굶주리는 사람 없이 밥은 지어 먹는지 밥 짓는 연기가 나는 것을 살펴본다고 하여 이 누각을 찰미루(察眉樓)라 불렀다”고 설명한다.낙민루 인근의 낙민관자료전시관에는 조상들의 애환과 체취가 묻어 있는 생활용품과 향토 유물 약 7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낙안의 역사적 배경과 낙안 관련 문헌,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가재도구와 생활용품, 낙안 지방에서 전래한 민속놀이와 통과의례, 음식문화를 알아볼 수 있다.◇ 초가와 돌담 그리고 고샅길 낙추문(樂秋門)이라고 불리는 서문은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다. 아직 문루는 복원되지 않았지만 옹성은 복원됐고 성문 양편으로는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성곽으로 오르는 길은 낙풍루, 쌍청루, 낙추문 양편으로 오르는 계단 이외에도 16곳이 있다. 주민들이 임경업 장군이 쌓은 성이어서 성벽에 손을 대면 부정을 탄다고 믿고 있어 성벽의 훼손이 적었다. 사진/이진욱 기자 서문 계단으로 올라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대나무 숲을 거쳐 곧바로 최고의 조망 지점에 닿는다. 발아래로 뭉게구름처럼 흩어져 있는 초가집과 관아, 장터 등 마을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 밖으로는 너른 들판이 아득하다.성곽을 쉬엄쉬엄 걷다 보면 이내 남문인 쌍청루(雙淸樓)에 이른다. 동문인 낙풍루와 달리 문이 하나다. 성문 앞에는 넓은 들이 있고 성내 모든 골목길이 그물처럼 남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부터 성안에서 초상이 나면 상여가 성문 밖으로 나갈 때 남문으로 나갔다고 전한다.성곽을 둘러본 뒤 마을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읍성의 중심 도로가 아닌 길들은 완만한 곡선형의 좁은 골목길이다. 양옆으로 눈높이 정도의 돌담이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형의 길이다. 돌담길의 폭은 1∼2m가 대부분이었지만, 3∼4m쯤 돼 보이는 제법 넓은 길도 있었다. 낮은 담 너머로 성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기웃거리다 보면 어디선가 개구쟁이 꼬마들이 누렁이와 함께 뛰어 나올 것 같다. 잊고 지낸 어린 날의 동경이 되살아나지만 이곳도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다. 젊은 사람들은 순천 시내에서 거주하며 아이를 키우기 때문이다. 초가집은 천천히 살펴보면 같은 듯 각각 다른 구조와 형태를 지녔다.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일자형 가옥으로 초가삼간이 많다. 간이란 기둥 사이를 말하며, 초가삼간은 네 개의 기둥이 세워진 3개의 공간으로 부엌 1칸, 안방 1칸, 윗방 1칸이 된다. 초가삼간 다음으로 많은 주택 형식은 네 칸 집이다. 그것은 세 칸에 대청을 하나 추가한 꼴인데 대청은 큰방과 작은방 사이에 들어간다.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은 동내리의 박의준 가옥(92호), 최창우 가옥(97호), 최선준 가옥(98호), 서내리의 김대자 가옥(95호), 주두열 가옥(96호), 김소아 가옥(99호), 남내리의 양규철 가옥(93호), 이한호 가옥(94호), 곽형두 가옥(100호) 등이다. 사진/이진욱 기자 남문을 내려오면 바로 문 앞에 초가삼간 최선준 가옥이 있다. 길가 쪽으로 가게를 두고 그 뒤에 살림방과 부엌을 붙여 놓아서 평면이 밭전(田) 자 형이다. 네 칸 집인 박의준 가옥은 19세기 중엽에 지어진 이방의 집이다. 1천300㎡(400여 평)에 달하는 너른 대지에 부속 채를 하나 거느리고 있다. 남내리의 길가에 위치한 이한호 가옥은 토담집 특유의 수수함과 소박함을 보여주는 집으로 부엌에는 부엌신인 조왕신이 모셔져 있다.대지와 사람이 두루 평안하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 ‘낙안’(樂安)처럼 이곳에서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듯 참 평온하다. 관람 시간은 동절기(12∼1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2월부터 4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요금은 일반 4천원, 청소년과 군인 2천500원, 어린이 1천500원. 문의 061-749-8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