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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2021년 6월 6일) 재일학도의용군 포화 속으로재일학도의용군 포화 속으로. 사진출처 : KBS 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포화 속으로 뛰어든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한반도는 비극의 전장이 되었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무기력하게 밀려나는 국군에 낙동강 방어선은 마지막까지 버텨 지켜내야 하는 최후의 전선이 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위기를 맞고 있던 그 때, 병역의무도 참전의무도 없었지만 기꺼이 바다를 건너와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있다. 조국 수호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바로 그들이다. 맥아더 사령부와 함께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 이후, 원산을 거쳐 함흥, 나진, 압록강 일대까지 진격하고, 장진호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재일학도의용군들, <시사기획 창>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 바쳐 싸웠던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따라가 본다. 메이지, 와세다, 게이오 대학 등 일본 명문대학 유학생들의 뜨거운 참전 열 ‘조국을 구하는 길에 군번도 계급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신문 호외 등을 통해 조국의 위기를 알게 된 재일동포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차별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재일동포들 사이에서 또 다시 조국을 잃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게 되었고, 이들은 구국을 위해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민단을 중심으로 국군 장병과 피난민들에게 보낼 위문품과 성금 모금, 의약품 지원이 신속하게 진행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동포들은 직접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도쿄와 오사카, 규슈 지역의 열다섯 개 학교에서 유학중이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원 입대자들이 모여들었고, 신체검사 등을 통해 최종 선발된 642명이 1진부터 5진까지 나뉘어 차례로 구국 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전황이 매우 불리하고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병역 의무도 참전 의무도 없었지만 누구보다 용감하게 전장으로 뛰어들 결심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당시 이들에게는 군번도 계급도 부여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장진호 전투, 백마고지전까지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보여준 숭고한 애국심 1950년 9월15일 오전 6시 30분. 집중 함포 사격으로 시작된 ‘작전명 크로마이트’. 1/5000의 성공확률을 뚫고 인천으로 상륙했던 미7사단과 함께 재일학도의용군 1진도 인천으로 들어왔다. 고학력자가 대부분이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초기 한국 지형을 잘 몰랐던 미군을 돕기 위해 주로 통역과 안내를 맡는 요원으로 활동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됐고, 이후 투입된 재일학도의용군들 중에는 원산을 거쳐 함흥, 나진까지 진격하고 압록강 일대까지 진격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군의 기습 참전으로 전장은 다시 혼돈에 빠졌고, 약 2주간 치열하게 전개된 장진호 전투에서는 미7사단에 배치됐던 재일학도의용군 80여명이 실종 희생되기도 했다. 고지전은 더욱 참혹했다. 철의 삼각지대를 지키는 전략 요충지였던 백마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맞붙었던 고지전은 근접 전투로 승패를 가려야 했기에 더 힘든 전투가 이어졌다. 그 중에는 일본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조국 전선에 남아 싸우기를 원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있었고, 그들은 초급장교를 배출하던 육군종합학교 제22기로 입교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끝까지 목숨 바쳐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3년간의 전쟁에서 국군과 미군 각 부대에 배속돼 참전했던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중 135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이제 아흔을 넘긴 재일학도의용군 생존자들이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지 않는 당시의 전황을 회고한다. 휴전, 총성이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버린 재일학도의용군 1953년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전장을 울리던 총성과 포성이 멈추었다. 그런데 전쟁이 멈추고 일본에서 건너온 참전자들은 전역 후 당장 갈 곳이 없어졌다. 휴전 1년 전인 1952년 미국과의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가 재일학도의용군들의 국적을 문제 삼으며 생존자 507명의 입국을 거부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버린 재일학도의용군 생존자들은 부산 초량동의 사찰인 소림사에 머물며 다시 귀국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들 중 국적 문제가 해결돼 일본에 있는 가족 품으로 또 학교로 돌아간 이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마지막까지 귀국이 거부돼 이곳에 홀연히 남기도 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전선으로 뛰어들었던 재일학도의용군들, 하지만 전쟁이 멈추고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생계를 꾸려야 하는 이들의 삶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다시 불러보는 그 이름, ‘친구야, 우리가 너 때문에 살고 있다.’ 7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재일학도의용군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 한국에는 단 세 명만이 생존해 그 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재일학도의용군 희생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 제16묘역, 아흔을 넘긴 박운욱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곳을 찾아 동지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묘비마다 남겨진 이름을 보며 어제 일 같이 그들을 기억하는 박운욱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장,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642명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역사에 남아 기억되기를 바라는 노병의 마지막 소원을 <시사기획 창>에서 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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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신년기획 끝내 이기리라 제2편 인천상륙작전KBS 1TV <역사저널 그날> 신년기획 끝내 이기리라. 사진제공 : KBS (국민문화신문) 유석윤기자=1월 12일 화요일 밤 10시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신년기획 끝내 이기리라 제2편 인천상륙작전에서 위기 극복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전세를 뒤집고 승리를 이끌어낸 우리 역사의 순간을 살펴본다. 1950년 9월 15일. 낙동강까지 밀린 전세를 뒤집기 위해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는데... 맥아더 장군은 단 4일 만에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었다? 북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우리가 잘 몰랐던 숨은 이야기를 <역사저널 그날>에서 알아본다.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맥아더는 1,2차 세계대전부터 한국전쟁까지, 20세기 주요 전쟁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 지휘관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왜 상륙지점으로 인천을 고집했을까? 큰 조수간만 차, 좁은 수로 등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인천을 선택한 이유를 알아본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맥아더 장군은 작전 개시 한달 전, 첩보부대를 파견하는데... 인천상륙작전의 승부사, 맥아더의 사진에 얽힌 뒷이야기부터, 이력, 패션까지 모든 것을 알아본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또 다른 주역들이 있다. 인천에 침투해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한 해군 첩보부대원과 켈로부대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총을 들고 나선 학도의용군과 바다를 건너온 재일학도의용군, 상륙작전을 수행한 해병대와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국군과 유엔군이 그들이다. 학도의용군이 군복이 아닌 교복을 입은 이유, 해병대의 고향이 모두 제주도였던 이유와 ‘귀신 잡는 해병’의 유래! 인천상륙작전을 곳곳에서 도운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역사저널 그날>에서 살펴본다. 한사람 한사람의 힘이 모여 기적을 이뤄낸 인천상륙작전의 그날. 역사학자, 군사 전문가, 심리학자, 영화감독, 역사를 전공한 가수가 다양한 시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살펴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첩보전의 역사, 사진으로 본 지도자들의 심리학, 노르망디 상륙작전까지, 동서양의 역사를 넘나들며 인천상륙작전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6.25전쟁은 또 다른 상황을 맞았다. 전쟁의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한국을 구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한 지도자의 결정이 한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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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윤경혁 일병, 6․25 앞두고 68년만에 가족의 품에 안기다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은 6월 19일 오전, 1950년 11월 미 1기병사단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故 윤경혁 일병(1923년생)의 아들 윤팔현(68세, 대구 달성군)씨의 자택을 방문해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와 국방부장관 위로패 등을 전달하는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를 가졌다.행사에는 국유단 단장, 책임지역 군 관계자, 대구 달성 군수, 유가족 등 30여 명이 참석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을 위로 했다. 이번 6․25전사자 신원확인은 2000년 유해발굴 첫 삽을 뜬 이후 128번째이며, 북․미 공동발굴에 의해서 국군의 신원이 확인된 5번째 유해이다.故 윤경혁 일병은 1923년 대구시 달성군 사사읍 문산리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후 1950년 8월경 28세의 나이로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입대하였으며, 미 1기병사단(카투사)으로 배치 받았다.당시 故 윤 일병은 아내 노상금씨와 1944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낳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故 윤 일병이 전사할 당시 아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총 반격작전을 개시하였으며, 10월 1일부 38선을 넘어 북한지역까지 진격하여 국토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크리스마스 공세(‘50. 11. 24)를 시작하여 첫날 8∼15Km까지 진출했으나, 11월 25일부터 중공군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고, 결국 38도선까지 전면철수를 해야만 했다. 윤 일병은 이러한 과정에서 전사( ’50. 11. 28)한 것으로 추정된다. 故 윤 일병의 유해는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1년 북한 평안남도 개천 지역에서 북․미 공동발굴에 의해 미군 유해에 섞여 발굴됐다. 미국은 96년부터 2005년까지 6․25전사자에 대한 북한과의 공동발굴을 통해서 다수의 유해를 발굴한바 있다. 이렇게 발굴된 유해는 미국 하와이에 있는 DPAA(미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로 송환되어 신원확인을 위한 정밀감식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유해속에서 극적으로 국군으로 추정되는 유해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한․미 양국은 업무 협약에 따라 한국군 추정 유해의 DNA 시료를 올해 초 국유단에 인계하였고, 윤 일병의 신원확인 계기가 마련됐다. 가족들의 유전자 시료채취 참여 중요성도 이번 사례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신원확인이 신속하게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故 윤경혁 일병의 아들 윤팔현씨가 2011년 6월 대구 달성군 보건소에 찾아가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발굴된 유해가운데 일치하는 유전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올해 5월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유해가 하와이에 와 있다는 소식을 알 게 되었다. ‘부자관계 확인을 위한 최종 검사 결과가 나오기 까지 가장 설레고 떨리는 시간이었다’고 윤팔현씨는 당시의 순간을 기억했다. 현재 故 윤 일병의 유해는 미국 DPAA가 있는 하와이에 있으며, 올해 7월 한․미 6·25전사자 유해 상호송환행사를 통해 고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故 윤 일병의 귀환은 북한에서 미국 하와이를 거쳐 다시 한국까지 68년의 시간, 약 1만5000km의 가장 길고 먼 귀향길이 되었다.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128명의 호국영웅의 경우 유품(인식표, 도장, 명찰, 사진 등)과 유가족의 유전자 검사를 통한 친족관계 확인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유전자 시료채취에 동참한 유가족은 약 4만여 명으로 6․25전쟁 이후 미 수습된 유해 대비 24% 수준으로 많이 부족한 실정이며, 6․25전쟁 세대와 유가족의 고령화 및 국토개발에 따른 지형변화 등도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는데 큰 어려움이 되고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대령 이학기)은 “국군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대한민국을 목숨바쳐 지켜낸 호국의 영웅들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약속을 이행하는데 의미가 있다.”면서, “이름 모를 산야에 묻혀계신 전사자 분들이 아직도 12만 3천여 위나 계신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영웅들이 하루빨리 가족의 품에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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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8군 평택시대 열다…"해외 미군기지중 최대규모"(종합)환영사 하는 토머스 밴달(평택=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11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미8군 사령부 신청사 개관식에서 토머스 밴달 미8군사령관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 xanadu@yna.co.kr미 8군사령부 신청사 개관식…64년만에 용산시대 접어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지휘소 개관식도 주한미군의 주축이자 상징인 미 8군사령부가 64년 만에 주둔지를 서울 용산에서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11일 새 청사 개관식을 했다. 이날 행사는 미 8군 군악대 전주곡 연주를 시작으로 애국과와 미국가 제창, 미 8군 군목 기도, 월튼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과 헌화식, 예포 발사, 지휘소 개관식, 미 8군가 및 미 육군가 제창 순으로 진행됐다.토머스 밴달 주한 미 8군사령관(중장), 태미 스미스 미8군 부사령관(소장), 리처드 메리트 미8군 주임원사를 비롯해 미군 측 300여명이 참석했다. 또 이상철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 서주석 국방부 차관, 임호영 연합사 부사령관(대장), 엄기학 제3야전군사령관(대장), 김리진 워커대장 추모기념사업회장, '명예 미 8군사령관'이자 6·25 전쟁영웅인 백선엽 예비역 장군 등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미 8군사령부는 이날 신청사 개관식을 하며 평택 험프리스 기지를 국내 언론에 공개했다.밴달 사령관은 환영사에서 "총 107억 달러가 투입된 이 건설 프로젝트(평택 기지 건설 사업)는 험프리스 기지의 규모를 확장해 미 국방부 해외 육군 기지들 중 최대 규모의 기지로 거듭나게 했다"며 "이 시설들이야말로 미 국방부의 해외 시설들 중 단연 최고"라고 밝혔다.이어 "2020년에 전체 기지가 완공되면 한미 양국 정부의 동맹을 향한 영원한 헌신이 주한미군의 변혁을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라며 "우리의 삶의 질과 부대 방호 수준, 궁극적으로는 오늘 밤에라도 당장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전투 준비 태세가 더욱 향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거대한 이번 사업은 수많은 조직의 계속된 노력과 양국간 효과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이 사업이야말로 미국과 대한민국이 계속 힘을 합쳐 주어진 모든 임무를 어떻게 완수해왔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라고 덧붙였다.우현의 한미동맹친선협회장(RUFA)은 축사에서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온 상황에서 험프리스 기지에 워커 장군의 동상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린다"며 "한미동맹이 여전히 굳건하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미 8군사령부의 평택 이전은 지난 4월 25일 6·25 전쟁 당시 8군사령관인 월튼 워커 장군 동상 이전식으로 시작됐다.신청사 개관식에서는 평택으로 옮긴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도 열렸다. 워커 장군의 증손자 샘 워커 씨도 이날 개관식에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미군 부사관 출신인 샘 워커 씨는 "증조할아버지를 대신해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의 모든 장병께 감사드린다"고 답사했다. 미8군사령부 평택 신청사 개관(평택=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11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미8군 사령부 신청사 개관식에서 토머스 밴달 미8군사령관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을 하고 있다. xanadu@yna.co.kr미 8군사령부의 평택 이전은 한미 양국 합의로 진행 중인 주한미군 평택 이전 사업의 일부다.주한미군 평택 이전 사업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주한미군 기지를 통·폐합해 안정적 주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2003년 한미 양국 정상 합의에 따라 본격적으로 추진됐다.주한미군의 중·대대급 부대 이전은 2013년부터 진행됐지만, 미8군사령부는 지난 3월 선발대 이전을 시작한 데 이어 지난달 본대 이전을 끝마쳤다. 미8군은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1950년 9월 15일 낙동강 전선에서 진격하면서 북한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1950년 10월께 38선에 도달했으며 국군 제1사단의 지원으로 평양을 점령했다.미8군은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공식 휴전상태에 돌입한 직후부터 용산에 주둔했다. 64년 만에 바뀐 미8군의 새 주둔지 험프리스 기지는 1961년 작전 도중 헬기 사고로 사망한 미 육군 장교 벤저민 K. 험프리 준위를 기념해 1962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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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 수도권서 충청으로 '유턴유세'…탈당파 껴안기도2박3일 'U턴 유세' 시작…오늘중 친박 징계 풀고 바른정당 탈당파 복당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는 대선 전 마지막 주말인 6일부터 2박 3일에 걸쳐 국민 대결집을 위한 'U턴 유세 캠페인'에 돌입한다.수도권에서 시작해 충청권을 거쳐 '텃밭'인 영남을 훑은 뒤 다시 충청을 찍고 상경, 8일 서울역에서 선거운동을 마감하는 동선이다. 그동안 TK(대구·경북)와 PK(부산·울산·경남)에서 '동남풍'을 일으켜 충청·수도권으로 북서진하는 데 주력했다면, 이번에는 수도권발(發) '서북풍'을 내려보내 표밭을 다지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대장정의 출발을 알린 것은 이날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국민대결집을 위한 대국민 호소' 기자회견이다.홍 후보는 회견에서 "이제 부끄러운 보수는 없고, 숨은 보수도 없다"며 "실망했던 분이 있다면 돌아오게 하고, 흔들리는 분이 있다면 강철같은 확신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기자회견을 마친 홍 후보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문화공원 광장, 부천시 마루광장, 시흥시 삼미시장, 안산시 상록수역 광장을 촘촘히 누비며 합동유세를 한다.또한, 인천 월미도를 찾아 거점 유세를 하고 해양경찰청 독립 및 인천 이전 등의 지역 공약을 재확인한다. 특히 월미도 방문은 6·25 전쟁에서 전세 역전의 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처럼 5·9 대선에서 막판 대역전극을 펼쳐보겠다는 각오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다음 행선지인 충청권 유세의 출발점은 충남 공주다. 공주는 지난 1일 민주당 이해찬 의원이 유세를 통해 "극우·보수세력들이 다시는 이 나라를 농단하지 못하게 철저히 궤멸시켜야 한다"고 언급한 장소인 만큼 홍 후보는 '증오와 분노의 정치'가 아닌 '치유와 통합의 정치'로 서민 행복을 우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을 방침이다.아울러 홍 후보는 보수 결집을 위한 마지막 카드로 사실상의 '대사면'을 단행키로 했다.그는 회견에서 "당헌 104조에 근거해서 당무우선권을 발동해 오늘 내로 모든 사람의 징계를 다 풀고 입당하겠다는 사람을 다 입당시키라고 비대위에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중 비대위회의를 열어 친박 핵심 서청원·최경환·윤상현 의원과 재판을 받는 모든 의원들의 당원권 정지 징계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바른정당 탈당파 12명과 친박계 무소속 정갑윤·이정현 의원을 복당시키겠다는 것이다.다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해 구속 상태인 당원들의 당원권 정지는 풀어주지 않는다고 이철우 사무총장이 전했다.만약 당대표 권한대행인 정우택 원내대표가 홍 후보의 지시대로 곧바로 비대위를 소집하지 않거나 난색을 표할 경우 다른 비대위원에게 대표 자격을 위임해서라도 반드시 이날 중 복당과 징계 효력정지의 절차를 진행시키겠다는 입장이다.이 사무총장은 별도의 기자회견을 통해 "오로지 친북좌파가 정권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그 일념 하나로 서로를 껴안고 모두 한마음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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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척' 하고 '폴더인사' 하고…대선후보 유세대결 스타트文측, '블랙리스트·장날 유세단' 검토…安, 연두셔츠 팔 걷고 '스킨십'洪, 시장서 '서민대통령' 부각…劉측 "인천상륙작전처럼" 필승 각오 19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의 스타트 총성이 울린 17일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후보들은 이른 아침부터 치열한 유세전을 펼치며 필승 각오를 불태웠다.이날 대구에서 첫 선거운동을 시작한 민주당 문재인 후보 측은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한 표를 호소했다.대구 달서구 2·28 민주의거 기념탑에서는 당의 상징인 파란색 옷을 입은 선거운동원들이 '든든한 대통령 문재인' 등의 피켓을 흔들며 오가는 시민들의 이목을 끌었다.여의도 당사 앞에서 중앙당 선거대책위가 연 필승다짐대회에서는 '엄지척' 유세전이 펼쳐졌다. 문 후보 기호인 '1번'을 강조하기 위해 선대위원들은 가수 홍진영의 '엄지 척' 로고송에 맞춰 엄지를 들어 보이며 '문재인'을 연호했다.이와 함께 문 후보를 측면지원할 각종 유세단도 발족할 예정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문화예술인이 주축이 된 '블랙리스트 유세단', 읍·면 단위의 5일장을 찾아다니는 '장날 유세단', 청년·여성 유세단 등을 조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출근인사에 나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당의 상징인 연둣빛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유권자들과 인사하는 등 적극적인 소통 행보에 나섰다.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좋은 나라를 만들어달라",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을 건네자 안 후보는 이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와 함께 장병완 총괄선대본부장, 최경환 비서실장, 김경진 홍보위원장 등은 허리를 90도 넘게 굽히는 '폴더인사'를 하며 "안철수, 국민이 이깁니다"를 연호했다.최근 화제가 된 안 후보의 '소몰이 발성법'도 어김없이 나왔다.그는 유세차에 올라 시민들을 향해 "누가 미래를 만들 지도자인지 선택해주십시오. 누가 더 좋은 정권교체인지 선택해주십시오"라며 "미래를 여는 50대 젊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외쳤다. 이날 새벽 서울 가락시장을 방문한 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서민 대통령'을 강조하는 유세전을 폈다.선거운동원들은 '당당한 서민 대통령'이라고 쓴 빨강색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을 돌았고, 홍 후보도 특유의 스스럼 없는 태도로 상인이 건넨 토마토 등 음식을 받아 먹었다.홍 후보 측은 이와 함께 '홍찍자'라는 문구를 새긴 홍보물로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홍준표를 찍어서 자유대한민국을 지키자'라는 메시지를 담은 대형 현수막 등을 당사 등에 설치했다. 또한 청년들이 주축이 돼 '홍준표 대통령 만들기' 유세단을 만들어 가동할 예정이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측은 '경제 대통령'·'안보 대통령'을 두 축으로 표심에 호소했다.당의 상징인 하늘색 점퍼를 입은 주호영 대표 권한대행은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서 열린 출정식에서 "인천 상륙작전이 있고 불과 13일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갔다"며 "오늘부터 22일 남았기 때문에 13일만에 수도권에서 일등을 하고 전국으로 간다"라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경제 살릴 대통령, 유승민이다"를 함께 외치기도 했다.아울러 아이돌그룹 트와이스의 '샤샤샤'를 개사해 "기호4번 유승민, 사사사"라는 노래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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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안방시장 매출 1위 영화는 '곡성''부산행'은 이용 건수 1위 '곡성'[이십세기폭스 코리아 제공]지난해 영화 '곡성'이 안방 시장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IP TV 및 디지털 케이블 TV(이하 TV VOD)의 전체 매출 순위를 집계한 결과, '곡성'은 78억9천만원의 매출을 올려 1위를 기록했다.1천156만명을 동원하며 극장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했던 '부산행'은 66억원으로 2위에 올랐다.687만명을 동원한 '곡성'은 지난해 극장 흥행 순위 8위에 머물렀지만, TV VOD 시장에서는 7주 연속 주간 이용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영진위 관계자는 "'곡성'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모호한 열린 결말이 주목을 받았다"면서 "영화의 숨은 메시지를 읽어내기 위해 반복해서 관람하는 'N차 관람' 열풍도 안방극장 흥행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55억7천만원의 매출을 올린 '럭키'는 3위를 차지했다. 이어 '검사외전'(54억3천만원), '내부자들'(44억7천만원), '주토피아'(44억4천만원),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43억7천만원), '터널'(43억6천만원), '아가씨'(37억9천만원), '인천상륙작전'(34억6천만원) 등의 순으로 매출이 많았다. '부산행'은 이용 건수 면에서는 1위(124만4천380건)를 차지했다. '곡성'은 117만9천372건으로 2위였다. '부산행'의 이용 건수가 '곡성'보다 많음에도 매출액이 적은 것은 가격 인하 프로모션 등을 진행한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부산행'은 TV VOD 출시와 함께 애니메이션 '서울역'과 함께 패키지 할인 행사 등을 펼쳤다. '부산행'[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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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길거리 가득한 삽교호 관광지로 봄나들이 오세요"당진시 "캠핑장 ·호수공원 개장…서커스 공연도" 삽교호 관광지 전경봄을 맞아 삽교호 관광지가 새단장을 마치고 관람객 맞이에 나섰다. [당진시 제공=연합뉴스] (당진=연합뉴스) 충남 당진시가 봄을 맞아 신평면에 있는 삽교호 관광지에 다양한 즐길거리를 마련하고 관광객 맞이에 나섰다.당진시는 지난 1일 삽교호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자전거 터미널을 개장한 데 이어 4일부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서커스 공연을 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3일 밝혔다.11일에는 가족과 연인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캠핑을 즐길 수 있는 캠핑장이 문을 연다. 1년여간 공사해 온 삽교호 호수공원도 다음 달 개장한다. 삽교호 함상공원[연합뉴스 자료사진]삽교호 관광지를 찾는 관광객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함상공원과 놀이공원, 짚트랙, 친수공원, 삽교호 방조제도 새 단장을 끝내고 관광객을 맞고 있다.2002년 4월 문을 연 함상공원은 우리 해군의 퇴역 상륙함(길이 100m.폭 15m)과 구축함(길이 120m.폭 12.5m) 등 군함 2척을 개조해 만든 공원으로, 지난해 개봉 영화 '인천상륙작전' 상당 장면이 이 곳에서 촬영됐다.삽교호 관광지는 바다와 호수를 한 곳에서 조망하며 사시사철 풍부한 해산물이 넘쳐나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수도권이나 호남권에서도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삽교호 관광지 바다사랑공원삽교호 관광지 안에 조성된 바다사랑공원. [당진시 제공=연합뉴스]시 관계자는 "올해 새로운 관광시설 인프라가 확충되는 만큼 예년에 비해 많은 관광객이 삽교호를 찾을 것으로 예상돼 주차장 확충, 환경 정비 등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 "삽교호 관광지를 전국 제1의 명소로 만들기 위해 체류형 숙박단지 조성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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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화' 진세연 "정말 열심히 해서 악플 없애고 싶었다""이건 화면에 안 나온 건데… 박태수가 죽었을 때 화가 난 옥녀가 사람들을 칼로 죽이는 장면을 원테이크(끊김 없이 한번에)로 찍었어요. 19일 배우 진세연(22·본명 김윤정)은 MBC 대하사극 '옥중화'를 촬영할 때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51부작 '옥중화'를 마친 진세연은 서울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자리에서 "기대가 컸지만 통편집이 됐다"면서 "옥녀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감독님이 판단하셨는데, 아쉬웠다"며 뒷얘기를 털어놨다.진세연은 '옥중화'에서 주인공 옥녀 역을 맡았다. 전옥서(감옥) 다모인 옥녀는 죄수였던 박태수(전광렬 분)에게서 학문과 무예를 배워 기존 사극에선 찾아보기 힘든 여성 영웅으로 맹활약했다. 미소가 아름다운 진세연(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진세연이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11.14 scape@yna.co.kr "감독님이 이유 없는 악역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셨죠. 그래서 정난정(박주미)이 죽을 때도 되게 짠했어요. 사람이 어쩌면 미쳐서 저렇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촬영 때 그 신이 좀 오래 걸렸는데, 선배님이 너무 고생하셨죠." 진세연은 '옥중화'를 촬영하면서 사극의 매력에 푹 빠진 듯 보였다. "다음에도 사극을 하고 싶고,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상이라든지, 사극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현대극에선 나올 수 없는 어떤 매력이 있는 거 같아요."그는 '구르미 그린 달빛'이나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같이 멋을 많이 낸 퓨전 사극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옥중화는 주말드라마고 시간이 없어서 예쁜 곳을 많이 찾아다니진 못했지만 그래도 풍경이 너무 좋았어요. 저도 이번에 예쁜 한복을 많이 입었지만 조끼 형식이 많았거든요. 저고리가 너무 입고 싶은 거에요. 마지막에 당의, 옹주 옷을 입었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다들 세연이가 예뻤구나 하셨어요." 진세연 '보호본능 일으키는 포즈'(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진세연이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11.14 scape@yna.co.kr진세연은 배우로서 운이 좋은 편이다.광고모델로 활동하던 중 열일곱 살 때인 2010년 SBS 드라마 '괜찮아, 아빠딸'로 데뷔했는데, 1년 만인 2011년 SBS 일일극 '내 딸 꽃님이'에서 바로 주연을 꿰찼다. 그 이듬해는 KBS 드라마 '각시탈'의 여주인공인 오목단으로 얼굴을 널리 알렸다. 올해는 '옥중화' 외에 관객수 700만 명을 넘긴 흥행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출연했다.데뷔 초부터 내내 승승장구하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그러다 보니 공연한 오해를 사고 남모를 마음고생도 많다고 털어놨다.팬들도 많지만 악플을 다는 안티팬들에 더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그래서 옥중화 처음 시작할 때 내가 정말 열심히 잘해서 그런 악플을 싹 없애버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얼마나 많은 분들께 통했을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얘기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작품 끝내면 진짜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섭섭함이 꽤 많이 남네요." 진세연 '하얀 피부에 블랙 원피스'(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진세연이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11.14 scape@yna.co.kr짧긴 했지만 진세연도 무명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배우 데뷔 전에 아이돌 가수를 키우는 한 연예기획사에 캐스팅돼서 연습생으로 3개월 정도 있었는데 그때 백댄서로 무대에 서기도 했어요. 그러다 광고 촬영을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기 쪽으로 빠지게 됐죠."2013년 연극 '클로저'에 주인공인 스트립댄서로 출연하기도 했다.진세연은 "드라마, 영화, 연극 가리지 않고 연기에 도움이 된다면 다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진세연은 어릴 적 꿈이 선생님이었다고 했다.흠모하는 선배 배우로는 공효진을 들었다. "최근에 '질투의 화신'을 클립 영상으로 봤는데 공효진 선배님이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너무 공감이 갔어요."앞으로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진짜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MBC 대하사극 '옥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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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이주민 롤모델 언더우드 서거 100년새문안교회의 첫 예배당이자 언더우드 선교사 사택으로 쓰인 정동 사랑채. [새문안교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부활절이던 1885년 4월 5일, 일본을 떠나 제물포항에 들어온 한 상선에서 벽안의 두 청년이 내렸다. 미국의 북장로회가 파견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元杜尤)와 미국 감리회 소속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였다. 당시 각각 27세와 26세로 연부역강하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열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해 선교의 씨앗을 심는 한편 근대적 교육기관의 효시를 세워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두 사람이 우리나라를 찾은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 피에르 모방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보다 4년 앞선 1832년, 네덜란드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가 중국 연안에서 풍랑을 만나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에 정박했다가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눠줬다. 1866년에는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들어왔다가 주민과 갈등을 빚어 선원들과 함께 숨졌다. 1884년에는 평신도 의료선교사인 호러스 알렌이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으로 파견돼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왕실 의사가 됐다.그러나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목적을 띠고 입국한 뒤 신도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운 개신교 목회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처음이었다. 출발은 언더우드가 빨랐다. 미혼인 언더우드는 방한 이틀 뒤 서울에 입성했고, 임신 중인 아내를 데리고 온 아펜젤러는 서울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5월 3일 다시 제물포로 입항했다.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돕다가 정동의 가옥 한 채를 빌려 고아들을 가르쳤다. 이듬해 5월 11일 언더우드학당(구세학당)을 개교했고 1905년 경신학교로 개명했다. 1915년에는 조선기독대를 설립했는데,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받은 뒤 해방 후 연희대를 거쳐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와 합쳐져 오늘의 연세대가 됐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3일 2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교육사업에 나섰다. 고종은 이듬해 6월 8일 '인재를 기른다'는 뜻의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하며 격려했다. 1885년 5월 3일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메리 스크랜턴은 이듬해 최초의 여성 근대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고,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빈민 의료 봉사와 선교에 나섰다.언더우드(원두우) 선교사의 손자인 원일한 교수에게 1973년 9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해 국민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교회를 세운 것도 언더우드가 먼저였다. 1886년 7월 11일 자신의 두 번째 조선어 선생인 노춘경에게 첫 세례를 준 데 이어 1887년 9월 27일 정동의 자기 집 사랑방에서 14명의 교인과 함께 첫 예배를 올렸다. 한국장로회와 새문안교회는 이날을 뿌리로 삼고 있다. 언더우드보다 앞선 1886년 4월 25일 부활절에 주한 일본대사관 직원에게 첫 세례를 준 아펜젤러도 정동의 조그만 집 한 채를 사들여 '벧엘예배당'으로 꾸민 뒤 1887년 10월 9일 첫 예배를 보았다. 한국감리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다. 오늘날 장로교와 감리교는 한국 개신교의 80%를 넘는 교세를 자랑한다. 언더우드는 한국어소사전과 찬송가 등을 펴냈고 아펜젤러,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한글 성경을 보급했다. 이 모임에서 '여호와'를 '상제'로 번역할지 '하나님'으로 옮길지, 'eye of needle'을 '바늘귀'로 할지 '바늘눈'으로 쓸지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빵'은 당시 조선에 없었던 탓에 결국 '떡'으로 표현하기로 결정됐다. 기독교청년회(YMCA) 설립에도 앞장선 1903년 언더우드는 초대 회장을 맡아 청년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한편 야구·농구·체조 등의 서양 근대 스포츠 보급에 나섰다. 1889년에는 명성황후의 시의로 일하던 제중원의 여의사 릴리어스 호턴과 결혼해 외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를 낳았다. 언더우드는 건강이 악화해 1916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0월 12일 그곳에서 소천했다. 뉴저지 교회묘지에 묻혔다가 유족의 뜻에 따라 1999년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로 이장했다.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하려고 배를 탔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마주 오는 배와 충돌해 익사했다.언더우드 가문의 3대, 4대, 5대 후손들이 2012년 6월 서울 신촌의 연세대를 방문해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연세대 제공]아펜젤러의 아들딸도 일제의 탄압 속에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발전시키는 데 헌신해 귀감이 됐지만 4대에 걸친 언더우드 일가의 한국 사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원한경은 3·1운동 때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등을 세계 교회와 언론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아들 원일한과 투옥됐다가 1942년 강제 추방됐다. 원한경은 광복 후 미국 육군성 통역요원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으나 부인 와그너가 좌익청년들에게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6·25가 터지자 민간 고문단으로 활약하다가 1951년 2월 부산에서 숨졌다. 장남 원일한은 연희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미국 해군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고 유엔군 정전협상 수석통역장교를 맡았다. 3남 원재한과 4남 원득한도 각각 미군 군목과 통역요원으로 참전했다. 언더우드의 증손자 원한광은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4년 11월 한국을 떠났고, 원한석은 한국에서 경영컨설턴트로 일하며 '퍼스트 무버' 등의 저서를 펴냈다.19세기 말 개화기에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서양인 가운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처럼 불꽃 같은 삶을 살며 헌신한 인물은 드물다. 더욱이 언더우드 가문처럼 100여 년간 누대를 이어오며 기독교정신에 입각해 봉사를 실천한 집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주민 가족의 롤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는 12일은 언더우드가 세상을 떠난 지 꼬박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는 개신교단들은 힘을 합쳐 전도에 나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에큐메니컬(교회 일치주의) 운동을 본받고, 학교를 사리사욕에 이용한다고 손가락질받는 몇몇 사학 설립자 집안들은 신교육의 요람을 만든 선교사들에게 육영사업의 참뜻을 배우며, 외국 국적을 병역 기피와 탈세에 이용하는 일부 부유층·권력층 인사들은 언더우드 일가를 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되새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