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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2023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항일 창작 쇼케이스 진행(국민문화신문) 구명석 기자=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유인택)은 다가오는 9월 15일 「2023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의 하나로 「항일 창작 쇼케이스」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함께 시행하는 「2023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은 2019년부터 시행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맥을 이어 추진되는 사업을 통해 공모사업의 가치에 공감하는 여러 예술인 및 기획자가 선정되었고, 경기도의 일제 문화 잔재 청산,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 및 애국·항일 정신 등을 소재로 역사 인식을 고취하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도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항일 창작 쇼케이스」는 본 지원사업의 <예술창작-준비> 분야에 선정된 다섯 단체의 무대로 구성된다. <예술창작-준비> 분야의 경우, 새로운 항일 공연 콘텐츠를 개발하는 예술인과 기획자의 미발표 신작을 지원하기 위하여 2023년에 신설된 것으로, 이번 쇼케이스를 위해 선정자들이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공연의 주요 장면을 무대화했다. 쇼케이스는 구둔치 전투를 창작 국악으로 풀어낸 「1907 구둔치(아트 스페이스 찰나)」, 일제 잔재 놀이 문화를 넌버벌 퍼포먼스로 표현한 「아시나요(올리버댄스컴퍼니)」,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연극으로 엮은 「소사신사(정차영)」, 여성 독립운동가 윤희순과 그녀의 의병가사집을 창작 국악으로 재창조한 「애달픈 노래(윤희연)」, 봉오동 전투에 얽힌 비밀 결사 전략을 스트릿 댄스로 풀어낸 「봉오동(김선엽)」 무대로 구성된다. 신진 및 프로 예술인이 창작 국악, 연극, 댄스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한 이번 「항일 창작 쇼케이스」는 9월 15일, 경기상상캠퍼스 공간1986 내 멀티벙커에서 진행된다. 행사는 13:30부터 시작되며, 선착순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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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연, 원주 벧엘교회서 “자유·평화·정의 3.1정신 계승”3.1만세운동 103주년 기념예배 및 기도회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국민문화신문) 유석윤 기자 =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송태섭 목사)이 3월 1일(화) 오전 11시 강원도 원주시 벧엘교회(조성훈 목사 시무)에서 3.1만세운동 103주년 기념예배 및 기도회를 열고 자유·평화·정의 3.1정신을 계승해 나라를 살리고 한국교회 예배를 회복하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한교연 회원 교단과 단체 대표와 교계 인사 등 3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식전 기념식과 2부 예배로 나뉘어 진행됐다. 최귀수 목사(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 기념식은 김효종 목사(상임회장)의 대회사, 애국가 제창, 이영한 장로(회계)의 ‘독립 선언문’ 낭독, ‘삼일절 노래’ 제창 순으로 이어졌다. 이어 기념예배는 조성훈 목사(공동회장) 인도로 묵도 후 신앙을 고백하고 찬송가 582장을 불렀다. 이어 홍정자 목사(서기)가 성경을 봉독하고 김학필 목사(상임회장)가 대표로 기도한 후 벧엘교회 찬양단의 특별찬양이 이어졌다. 이어 대표회장 송태섭 목사가 ‘3.1 정신’ 제목으로 설교한 후, 안진식 목사(공동회장)가 ‘자유민주주의와 복음 통일을 위해’, 조준규 목사(총무협 서기)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주민자치기본법 철폐를 위해’, 김용기 목사(군선교위원장)가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김명식 목사(공동회장)가 ‘한국교회와 한교연을 위해’, 김옥자 목사(여성위원장)이 ‘코로나 종식과 예배 회복을 위해’ 각각 특별 기도했다. 예배는 김병근 목사(공동회장)의 3.1만세운동 103주년 기념 메시지 낭독과 이병순 목사(공동회장)가 인도한 만세삼창 후 김훈 장로(기획홍보실장)가 광고하고 원종문 목사(상임회장)의 축도로 마쳤다. 송태섭 목사는 이날 설교에서 "3.1절은 태극기와 십자가로 뭉쳐진 역사적인 변혁의 날이다. 그날을 기폭제로 자유와 민주 정신이 세계열방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또 3.1 정신은 십자가 정신이자 예수님 정신이다. 성경에 하나님사랑 나라사랑 이웃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3.1정신의 모태가 되었다. 3.1정신은 평화 비폭력정신이며 부활의 정신이다. 믿음의 선조들은 무력앞에 굴복하지 않고 피를 흘림으로써 그 토대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졌고 세계가 놀랄 정도로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교회는 지금 위기에 빠져있다.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3월9일 대선에서 우리 모두가 바른 선택을 하는데 달려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섬기며 다음세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지도자를 선택하기 위해 반드시 투표에 임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교연은 김병근 목사가 낭독한 ‘3.1만세운동 103주년 메시지’에서 “3.1운동은 103년 전 일제의 모진 탄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자유와 평화, 정의를 위해 맨몸으로 일어나 독립 만세를 외친 역사적인 사건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축이 된 민족 대표 33인이 기미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했다. 3.1만세운동 이후 이 땅의 교회들이 당한 환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일제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630여 명을 살해하고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잔인하게 고문했다. 일제가 교회를 탄압하고 교회 지도자에게 모진 고통을 가한 이유는 바로, 교회가 나라 잃은 백성의 영적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어둠이 온 세상을 덮어 희망이 사라진 그때 주기철 목사 등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향한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당당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 불굴의 믿음을 어여삐 보신 하나님께서 일제를 물리치시고 우리 민족에 광복을 안겨주셨다. 오늘의 한·일 관계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 마음에서 가장 먼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일본이 국가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가한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진정으로 반성하고 책임지지 않는 한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정부도 ‘죽창가’를 부르며 반일 감정을 부추길 게 아니라 한·미·일 안보 공동체라는 냉엄한 현실 인식에 입각해 양국이 불행했던 과거를 털어내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3월 1일 일주일 뒤인 3월 9일은 제20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다.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오늘과 미래가 유권자인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103년 전 나라와 백성을 살리기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났던 그때 그 믿음과 정신으로 투표에 임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2년 동안 정부로부터 생명과 같은 예배를 금지당하는 핍박을 견뎌왔다. 이런 핍박에 수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아야 했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더 큰 문제는 동성애를 조장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각종 악법을 제정해 기독교를 뿌리 뽑으려는 악한 시도이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가 외면과 침묵을 정당화하는 것은 과거 ‘신사참배’보다 더한 불의를 방조, 또는 동조하는 죄악이다. 누구를 지도자로 선택하느냐 하는 건 온전히 유권자인 내 선택에 달렸지만 바른 선택과 분별력을 위해 책임있게 나서는 것 또한 교회의 본분이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약2;26)이다. 나라를 위해 한국교회를 위해 반드시 투표에 임해주실 것을 당부드리며, 3.1운동 103주년을 맞아 순교 선열들의 애국애족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정의, 평화, 자유의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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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대학 숭실대, 그 역사를 담아내다숭실대학교. (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올해 개교 124주년을 맞이하는 숭실대학교(총장 장범식)는 1897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으로 많은 역사와 아픔이 담겨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숭실대학교는 ‘진리와 봉사’를 건학이념으로, ‘통일시대의 창의적 리더’를 인재상으로 하여 혁신을 이끌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의 역사는 1897년 10월 10일 미국 북장로교의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숭실 학당에서 시작된다. 숭실 학당은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참된 교사와 교역자 양성이라는 설립 목적 아래 중등 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숭실 학당은 1900년 가을 신학기부터 수업연한 5년의 중학과정인 숭실학교로 발전하여 1904년 5월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숭실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민족의 독립에 이바지할 젊은 인재를 양성했다. 대다수졸업생들이 교역자·교육자로 활약했으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졸업생도 상당수가 있다. 최초의 근대대학 숭실대학교는 1906년에 4년제 대학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과정의 교육을 실시했다. 장로교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경영에 참여했으며, 교명은 ‘Union Christian College’, ‘평양예수교 대학’ 또는 ‘평양숭실대학’이라고 했다. 숭실대학은 미장로교 선교부가 주체가 되어 세워졌지만, 선교사들과 한국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민을 위한 ‘기독교정신’과 평양주민들의 교육구국을 위한 ‘민족정신’이 결합되어 설립된 기독교 대학이었으며 근대민족대학이었다. 숭실대학은 근대학문체계를 최초로 도입하여 교육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학교육의 효시가 됐다. 숭실대학 교육. 숭실대학 교과서. 숭실대학 초기 교과는 성경, 수학, 물리학, 자연과학, 역사학, 인문과학, 어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개설됐다. 초기 교재는 주로 미국에서 사용하던 교과서를 번역, 재편집하여 인쇄했다. 숭실대학에서 운영하던 기계창에서 등사하여 사용하였으며, 나중에는 한글 활자를 구비한 일본 요코하마[橫濱]의 복음출판사에 보내어 인쇄했다. 이후 대학 내에 출판부를 설치하고 교과서를 비롯하여 기독교 서적 및 각종 학술서적을 간행했다.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항했다. 이는 숭실대학이 기독교 정신 함양과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는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지교육 강요로 인하여 1925년 전문학교로 개편됐다. 그러나 전문학교로 개편된 이후에도 대강당, 기숙사, 본관의 신축 및 증축을 통하여 교육 시설을 완비하고, 농과를 설치하여 농촌지도자를 배출하는 등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최고 교육을 통해 숭실이 배출한 인재들은 교역자, 교사, 음악인, 학자 등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상당수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일제강점기 숭실대학의 학생들은 전도활동을 비롯하여 음악, 체육, 문예 등 다양한 방면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한국민에게 희망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전도 활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근대음악의 도입에 초석을 닦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체육활동에서도 축구를 비롯하여 각종 종목에서 한국 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문예활동에서도 한국의 훌륭한 문인들을 다수 배출했다. 근대적 문물수용에 앞섰고, 항일의식이 강했던 평양에서 출범한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민족적 자존과 양심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한말 외교권 박탈에 항거하여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했으며, 많은 졸업생들이 신민회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주도했고, 평양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학생운동에 앞장섰다. 폐교관련 보도자료. 평양숭실 캠퍼스모형(1930년대). 또한, 1930년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숭실대학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1938년 3월 자진 폐교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와 민족혼을 지킴으로써 ‘기독교 대학’이자 ‘민족대학’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행동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숭실 동문들은 평양에 숭실대학을 재건하고자 했으나 공산정권 수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5월 10일 서울 영락교회의 부속 건물을 임시교사로 하여 재건했다. 1957년에는 현 상도동 캠퍼스로 이전하여 서울 숭실로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됐다. 1960년대 숭실대학 모형. 1967년에는 김형남 학장이 취임하면서 지난날 신문화와 과학문명 도입에 앞장섰던 전통을 되살려 공학부를 설치하고 국내 대학 최초로 전산교육을 실시했다. 1971년에는 대전대학교와 통합, 종합대학으로서의 체제를 갖췄고, 1983년에는 대전캠퍼스와 분리하여 유서 깊은 옛 이름 ‘숭실대학교’로 교명이 환원됐다. 현재 숭실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에 두고 지식 정보화 교육을 선도하는 등 첨단 교육환경을 배경으로 21세기를 선도하는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코로나 19 상황 이전부터 비대면 교육을 준비해온 숭실대는 지난 2018년 NHN와 국내 대학 중 처음으로 클라우드 기반의 스마트 캠퍼스를 선도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클라우드 컴퓨팅 분야 MOU’를 체결했다. 올해 3월 서버 안정화를 위해 기존 서버를 클라우드로 이관을 마쳤으며, 교수 대상 원격교육 역량강화 지원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지속될 비대면 수업을 보다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건물마다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이 가능한 하이브리드 강의실 6개 실을 확충하고 문제 해결 중심의 자기주도형 학습을 지원하기 위해 인게이지드 러닝(Engaged learning) 강의실을 구축했다. 아울러 비대면 강의를 위한 신규 1인 스튜디오의 꾸준한 증설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박물관의 숭실역사실. 숭실대학교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숭실대학교 정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숭실대학교 부속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찾아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곳에는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약 1만 600여 점의 한민족 및 한국 기독교 관계 자료와 유물을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 중국과 로마 시대의 유물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역사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기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한국의 역사와 배경, 문화적 가치에 대해 배우고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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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 역사와 문화를 한 공간에 담다숭실대학교 한국 기독교 박물관. (서울=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숭실대학교 부속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 정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약 1만 600여 점의 한민족 및 한국 기독교 관계 자료와 유물을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 중국과 로마 시대의 유물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1층 한국기독교역사실과 2층 숭실역사실, 3층 근대화와 민족운동사실, 고고미술실 등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시민과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과 한국기독교문화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숭실대학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김양선 교수의 일생에 걸친 열정과 그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장로교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고(故)김양선 교수가 미군정청으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아 1948년 4월 20일 서울 남산에 있는 옛 조선신궁 터에 ‘기독교박물관’과 ‘매산고고미술관’을 개관·운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하여 많은 자료가 분실되고 박물관 자리가 국회의사당 부지로 결정됨에 따라 1958년 2월 28일 폐관됐었지만, 그 후 김양선 선생의 민족문화와 기독교 문화 창달을 위한 숭고한 뜻에 의해, 1967년 10월 10일 숭실 개교 70주년을 맞아 숭실대학교 부속 박물관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실. 박물관 1층 한국기독교역사실은 한국기독교 역사의 전사에 해당하는 경교 관련 유물들을 비롯하여 초기 천주교 교리서와 신앙서적, 박해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여 천주교의 수용과 자생적 천주교회 설립 성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개신교의 수용과정과 선교사 활동, 기독교의 발전상을 살펴볼 수 있는 한글 성경을 비롯한 다량의 자료가 전시되어있어 개신교의 발전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기독교는 한국기독교의 역사의 전사에 해당하는 경교로부터 시작한다. 경교는 기독교의 한 종류로 페르시아 지방에서 7~8세기 중국에 전래 되어 유행했던 기독교의 일파이다. 당시 당과 밀접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던 통일신라에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돌십자가. 전시실을 들어가자마자 바로 만나볼 수 있는 유물은 ‘경교 돌십자가’이다.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십자가 형태의 석물로, 8~9세기 무렵 경교가 우리나라게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다. 한글 성경. 찬송가. 한국개신교는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외국 선교사가 비기독교국가인 한국 땅에 공식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들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 출판하여 읽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기독교가 외국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기독교인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속에 형성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의 개신교 유입은 1832년 내한한 독일 출신인 선교사 귀츨라프와 1866년 이 땅에서 첫 순교자가 된 영국 선교사 토마스의 선교 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외국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여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켰고, 성경 번역과 문서선교를 통하여 신앙 확산에 노력하였다. 전도문서 출간. 조선성교서회는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및 정기간행물과 잡지류를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된 이래 1890년 ‘성교촬리’를 시작으로 ‘훈진언(1891년)’,‘쟝원량우샹론(1892년)’ 등 전도교리문서를 출간했다. 선교사들의 성서번역을 비롯한 초기 문서선교 사업은 기독교와 일반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사업에 주력하는 한편 선교체제가 정착되어 가면서 점차 한글 성경 보급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7년 서울지역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 ‘누가복음전’을, 1892년 ‘마태복음전’을 발간했다. 그 후 성서 번역사업은 급진전되어 1900년 마침내 ‘신약전서’ 출판하게 된다. 번역위원으로 언더우드, 아펜젤러, 레이놀즈, 게일, 스크랜톤, 최병헌 등이 활약하였다. 광범위하게 보급된 한글 번역 성경은 기독교계의 한글 교육과 계몽운동을 촉진하였고 한글의 민중문자화에 공헌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유화적인 문화정치로 통치방식을 전환하면서 외견상 문화활동의 폭은 넓어졌다. 기독교계 역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문화 활동이 기독교 신문 잡지의 발간과 교육사업이다. 그리스도신문. 기독교 관련 서적의 발간으로 서구 신한과 문화를 국내에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적 기독교문화 창출에 기여하였다. 1897년 2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죠선크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하였고,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가가 ‘그리스도신문’을 주간으로 창간했다. 1915년에는 양교파 연합으로 기독교 주간신문인 ‘기독신보’를 발행하였다. 식민 통치를 받으면서도 한국교회는 기독교 문서운동, 주일학교 운동, 농촌운동 들을 통해 민족사회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30년대 들면서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함에 따라 기독교계는 크게 동요하게 된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교회와 교인들은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자발적 수용과 전파라는 역사적 경험 위에서 한국개신교는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최대 교단이던 장로교는 조선예수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여 한국교회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조직은 정규 신학교육 및 주일학교 운동 등의 발전으로 더욱 그 토대가 강화되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송만영 관장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앞으로 각종 학술활동 및 사회교육활동 등을 통해 한국의 문화유산과 기독교 문화를 보다 정확하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한국기독교문화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하기에 충분하다. 기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한국기독교박물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전반적인 기독교역사와 배경, 문화적 가치에 대해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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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년의 역사가 깃들인 숭의 여자 대학교, 그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서숭의 여자 대학교 전경. (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118년의 역사를 가진 숭의여자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립 여자 전문대학교이다. 일제에 항거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조국을 지킨 독립유공자들을 이곳, 숭의여대에서 만날 수 있다. 김경희, 최형록, 이효덕, 안정석, 구순화, 김온순 등의 독립유공자를 다수 배출한 숭의여자대학교는 1903년 평양에 개교한 조선 최초의 여학교이다. 과거 우리나라 여성들은 가부장권이 철저히 확립된 채 순종과 인내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다. 여성들은 가사 노동이 중심이었고 사회활동, 경제활동 등에서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 쇄국 정치가 무너지고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이 이루어지며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여성들의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884년 7월에 맥클레이에게 허락한 고종의 선교 윤허는 학교와 병원 사업에 국한되었다. 의료선교는 1885년 알렌에 의해 광혜원이란 병원이 세워졌고, 학교 선교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에 의해 서울에서 남녀 학교가 세워지고 지방에도 선교부 또는 지방 교인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가 늘어났다. 기독교의 의료, 교육 선교 정책이 뿌리를 뻗어 사회에 새로운 풍조를 일으키자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그러던 1903년 한국 역사의 여명기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포 삼열 목사가 교육과 선교를 목적으로 근대 서구식 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숭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숭의의 설립자인 마포 삼열 목사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무수한 위기와 수난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한국인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일을 추진했으며,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말씀으로 어린 양들을 양육하는 겸손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었다. 1897년 여성 교육의 깃발을 들고 평양에 하나님의 진리와 신문학을 가르치는 새 교육기관인 ‘예수교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학제는 6년 과정으로, 1903년제 1회 졸업생 3명 김애희, 김유선, 김경희가 배출되었다. 예수교소학교를 나온 세 명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해 중등교육을 실시하자는 마포삼열목사의 계획을 선교부에서 받아들여, 1903년 10월 31일 조선 최초의 여학교, 숭의여학교가 탄생되었다. 1908년 5월, 숭의여학교 제 1회 졸업생인 김보원, 김유선, 김경희, 김애희, 김신보는 3·1 만세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숭의는 ‘의를 높이고 숭상한다’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일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 봉사 실현에 더욱 힘썼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완숙한 인간성을 형성하도록 노력했다. 김보원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고 1919년 ‘애국부인회’를 조직한다. 애국부인회는 뜻을 함께할 이들을 모으고 회비를 걷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김유선은 3·1운동 후 전도대를 조직해 독립정신 함양에 힘을 기울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본격적으로 펴나가자 1913년 숭의여학교 졸업생으로 숭의여학교 교사를 거쳐 숭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경희는 숭의여학교 교사였던 황애덕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여성 비밀 결사대인 송죽회를 조직했다. 숭의의 교사들은 수업 과정에서 애국, 애족사상을 은밀히 주입시켰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919년 고종의 붕어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타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송죽회 대원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가 하면 모금 활동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송금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또한, 3·1운동 전 몰래 200여 개의 태극기를 만들어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1930년대 들어 일제의 식민정책이 ‘민족말살정책’으로 한층 노골적으로 변하면서 탄압의 강도가 더욱 세졌다. 이 당시 일제가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하면서 기독교계 학교와의 대립은 더욱 심화됐다.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가 계속됐으나 당시 숭의여학교 교장이었던 선우리 교장은 요구를 거부하며 1936년 1월 18일 답변서를 제출하였지만, 이에 조선총독부는 숭의여학교를 폐교하고, 선우 교장을 직위 해제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 땅의 여명기에 많은 여성 인재를 길러 새 역사 창조에 크게 기여한 명문 여학교 숭의여학교는 신사참배라는 부당한 강요에 맞서 싸우다 마침내 스스로 문을 닫게 되었다. 1952년 당시 박현숙 선생은 숭의 재건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일제의 강요에 항거하다 폐교를 한 숭의여학교는 1953년 4월, 박현숙 선생이 재단법인 숭의학원을 설립함에 따라 숭의여자고등학교로 재건되었다. 신사참배 터 숭의학원 설립. 그 자리는 우연히도 일제의 탄압을 상징했던 남산 캠퍼스, 경성 신사 자리였다. 숭의인들은 1955년 11월 23일 교사 건축공사의 첫 작업으로 신사 건물을 철거하며 다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1924년 유치원 교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보육과를 설치한 이후 재건 후에도 이 전통을 계승하고자 보육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재건을 준비하던 당시 숭의여학교 출신인 이영보 선생이 한국 보육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를 숭의학원이 흡수 통합해 ‘숭의보육학교’가 출범한다. 이후, ‘숭의보육전문학교’ ‘숭의여자전문학교’를 거치며 학과 증설이 이뤄지고, 현재의 ‘숭의여자대학교’가 됐다. 한편, 1999년 5월 7일 이사장 취임식 예배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백성학 이사장은 “숭의 건학이념의 뜻이 깊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학교, 하나님이 기뻐하셔 언제든지 복을 내려 주시는 학교로 만들어가겠다.”라고 취임사를 전했다. 숭의 인물관. 숭의여자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한 숭의 인물관은 숭의를 통하여 의를 실천하고 신앙과 조국을 사랑한 인문들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기존의 김옥길 기념실과 홍종명 갤러리를 확장하고, 마펫 기념실과 박현숙 기념실, 평양 숭의 인물실을 추가하여 총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숭의 마펫 기념 교회. 숭의마펫기념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섬세한 인도 가운데 창립된 교회이다. 숭의 학교는 서울로 옮겨와 남산에 있던 일제의 신사참배 자리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고백한 살아있는 신앙의 학교이다. 이러한 영적 사명을 이어가기 위하여 숭의 마펫 기념교회는 2011년 1월 2일 설립되어 하나님의 높은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고자 하고 있다. 섬김과 나눔의 실천을 위해 헌금의 70% 이상을 이웃과 민족과 세상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데 쓰고 있다. 한편, 숭의여자대학교 공식 홈페이지와 캠퍼스 내에 위치한 숭의 인물관에서 숭의여자대학교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숭의여자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다수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기도 했으며, 그 역사 또한 깊다. 현재에도 많은 여성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앞으로도 위와 같은 기독교 대학들이 기독교 인재들을 많이 배출해 기독교를 알리고 발전시키는데 큰 힘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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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개신교 개혁과제는…루터 재조명 등 행사마르틴 루터 동상(아이슬레벤<독일> EPA=연합뉴스) 독일 아이슬레벤 시장 광장에 설치된 마르틴 루터의 동상. 아이슬레벤은 루터가 태어나고 숨진 곳으로, 1.5t 중량의 이 청동상은 1883년 루터의 400회 생일을 기념해 조각가 루돌프 지머링이 만든 것이다. 2017.1.3.한국 개신교계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개혁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각종 기념사업 준비에 바쁜 모습이다.세계교회는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기념일로 정하고 10월 마지막 주를 종교개혁주간으로 기념하고 있다.종교개혁 정신에 비추어 오늘날 한국교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거듭남을 모색하는 세미나와 기념대회, 캠페인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연중 이어질 전망이다.개신교 교단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지난 2014년부터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NCCK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은 회개와 반성에 방점이 찍혔다. 한국 근현대사에 기독교가 세운 공은 공대로 인정하되 과오를 철저히 되짚어야 새로운 500년을 열어갈 수 있다는 취지다. NCCK는 올해 상반기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교회의 과오를 정리하는 토론회를 여는 한편 '한국교회 개혁운동을 진단한다'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해 각 교단의 개혁운동을 소개하고 한국교회의 개혁과제를 점검할 예정이다.또 '미래를 위한 첫걸음 : 기억과 반성의 순례'라는 타이틀로 캠페인도 진행한다. 남산의 신사참배 장소와 베트남 전쟁 민간이 피해 지역 등 역사적 과오의 현장을 찾아 진정성 있는 반성의 시간을 보낸다는 계획이다.NCCK는 하반기에는 '미래를 향한 전진 : 고백과 선언'을 주제로 학술대회와 기념대회 등을 열고 '한국교회를 위한 95인의 고백'이라는 책자도 발간할 예정이다. 특히 오는 10월 28∼29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 NCCK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가 눈길을 끈다. NCCK 관계자는 "NCCK 회원 교단과 비소속 교단이 연합해 예배를 올리고 다양한 행사를 치름으로써 다양성 속에 교회 일치를 경험하고 교회개혁을 위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 역시 총회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의 세부 내용을 논의할 예정이다. 마르틴 루터 유언장(부다페스트<헝가리> EPA=연합뉴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국립 기록보존소에 보관된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유언장의 모습. 2016.1.3.교단별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설립된 첫 개신교회인 루터회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다. 기독교한국루터회(루터회)는 루터 연구지 발행과 저작물 번역 사업에 나선다. 아울러 루터회는 오는 5월 29일∼6월 2일 비텐베르크에서 열리는 세계 종교개혁 박람회에 참여하고 8월에는 아시아 루터교 미션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등 국제적 교류사업도 진행한다. 또 기독교 역사와 루터회의 역사를 다룰 전시관을 오는 10월 중 개관하기로 했다.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의 연계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루터회는 기장과 함께 예전(禮典)과 직제(職制) 연구에 착수하는 등 교단 간 교류 폭을 넓혀갈 예정이다. 기장은 종교개혁에 관한 의식조사 등 기초 연구 자료를 만들고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종교개혁 이야기집 등 다양한 출판물 간행사업도 진행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은 학술대회와 세미나를 열어 종교개혁의 신학을 재조명하고, 종교개혁 500주년 평전시리즈를 펴낸다. 예장 통합은 거룩성 회복 사경회(査經會)와 종교개혁기념음악회를 마련하는 등 교단별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 준비가 한창이다.아울러 2017종교개혁500주년성령대회(성령대회)와 세계성령중앙협의회는 오는 8일 오후 5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2017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개혁실천 신년기도회'를 연다. 이날 기도회에는 성령대회 명예 대회장 이영훈 목사와 대회장 소강석 목사가 설교를 맡아 개혁의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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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 백색순교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8월 무더운 여름에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오르는 길은 마냥 뙤약볕만은 아니었다.좌우에는 숲이 우거져있었고, 오르막 그늘에 세워져있는 순교자 기념비가 우리에게 숭고함과 경건함을 선물해 주는 듯했다.기념관 앞에 있는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안내판과 십자가를 보며, 침묵으로 순교자들을 기리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국내,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든 순교자분들을 위한 기념관으로, 1983년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경기도 용인 소재 10만 평의 땅을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재단에 기증함으로써 세워지게 되어 1989년 11월에 개관하였다.역사화 40여 점이 전시된 1층을 시작으로 1930년대 이전 개화기의 한국 교회와 사회상을 담은 사진 120점이 전시되어 있는 2층, 순교자들의 존영과 유품이 전시돼 있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 한국교회를 위해 순교하신 545명의 순교자들의 이름 우리나라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숨진 순교자들은 2600명 정도이지만, 대부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수는 북한에서 순교하셨기 때문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으며, 이곳에는 545명의 순교자분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다. 모든 순교자들 중 시대의 흐름에 따른 6분의 순교자들은 우리의 믿음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왼쪽부터 토마스 목사, 백홍준 장로, 주기철 목사 토마스 목사는 1840년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런던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1864년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부임하였다. 중국에서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그는 조선 선교의 꿈을 지니게 되어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내한하였으나, 9월 3일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하였다. 백홍준 장로는 1848년 평북 의주 출생으로, 1876년 중국 만주에서 로스 목사를 만나 한국인 최초로 세례교인이 되었고, 그의 성경 번역을 도와 최초의 한글 성경이 출간되는데 기여했다. 1887년 조선인 최초의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사교를 전한다는 죄목으로 구금되어 2년간의 옥중생활 끝에 1893년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경남 웅천 출생으로, 오산학교와 연희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부산과 마산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부터 신사참배 반대를 주도했으며,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끝까지 투쟁했다. 그는 결국 7년여의 옥고 끝에 1944년 4월 21일 순교했다. ▲ 왼쪽부터 신석구 목사, 문준경 전도사, 손양원목사 신석구 목사는 1875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감리교 목사로 서울 수표교교회를 시무하면서 33인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일제 말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교단이 굴복하자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목회했다. 해방 이후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산정권에 저항하다가 체포, 구금되었다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1950년 10월 10일 총살을 당해 순교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2월 전남 신안 출생으로, 증도의 믿음의 어머니로 불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59세의 일기로 해남에서 패퇴하던 북한군에 의해 순교하기 전까지 18년 동안 증도를 비롯한 전남 신안군 일대 도서지역을 고무신을 신은 발로 누비며 100여 곳의 교회를 세웠고, 이를 통해 많은 교계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손양원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 출생으로, 첫 목회 지인 여수 나환자 마을의 애양원 교회에서 평생을 시무하며 환자들을 지성으로 보살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간 옥고도 치렀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때 두 아들이 피살되었으나, 그는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자신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총살을 당해 순교하였다. 모든 순교자들을 비롯하여 시대별로 순교하신 6분의 순교자들은 모진 수모를 겪음에도 믿음을 지켜 적색 순교 시대를 지나 오늘날 백색 순교의 시대를 열어주셨다.그들의 신앙과 헌신과, 결단과, 순교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피를 세운 한국교회를 든든하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유품을 돌아보고 있는 정한조 목사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담당 정한조 목사는 ‘성경을 읽다 보면 예기치 않은 구절에서 말씀에 은혜가 될 때가 있다. 이곳을 찬찬히 둘러보다 보면 어느 순교자의 삶이라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우리에게 들게 하시면 그분이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라면서 ‘여기 있는 순교자들은 적색 순교를 하신 분들이시다. 적색 순교는 악한 시대에 악한 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일어나는 순교이고, 오늘날에도 순교의 시대가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백색 순교의 시대이다.’ (백색 순교는 과거 악한 시대와 같이 믿는다고 하여 피를 흘리는 핍박을 받지 않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삶 속에서 오는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12장 1절~2절에 있는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백색 순교자들이고,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이 들 때 이곳에 찾아와서 한번 둘러보게 된다면 신앙에 큰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된다.’라고 말씀하셨다.▲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고난의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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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당당하게 할말 다할 것"…한일정상 과거사논쟁 벌이나日 진솔한 사과 일관된 입장 견지…아베 "미래 지향" 모호어법 가능성2005년 노무현·고이즈미, 2011년 이명박·노다 '정면충돌' 회담 전례 (서울=연합뉴스) 이광빈 기자 =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내달 2일 첫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인 가운데 박 대통령이 최대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29일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3년반만에 성사된 한일 정상회담의 기본 콘셉트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통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이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회담을 진행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측이 성의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했다. 핵심 참모는 "위안부 문제에 진전이 있어야 한일관계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전제"라며 "박 대통령이 당당한 자세로 회담에 임해 짚을 것은 짚고, 할 말을 다 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 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과거사에 대한 진솔한 사과 등 명확한 입장을 일관되게 요구해왔다.위안부 문제는 박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 전제조건으로 제시해온 만큼,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를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전날 일본 현지언론과 위안부 문제와 관련, "박 대통령과 그런 과제를 포함해 솔직하게 의견 교환을 하고 싶다"며 ""미래를 향해 어떤 관계를 구축할지에 관해서도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하지만, 아베 총리는 한일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기 보다는 박 대통령 요청에 대해 "미래를 위한 관계를 구축해나가자"는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위안부 문제는 양국이 지난 9월까지 9차례의 국장급 협의를 했는데도 양측의 입장 차가 뚜렷해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정상회담 전까지의 접촉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않으면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양국 정상은 평행선을 달릴 것으로 보인다. 일단 청와대는 충분히 대화할 시간을 갖겠다는 입장이다.아울러 박 대통령이 내친 김에 일본 안보법제에 대해서도 우리의 입장을 언급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일본의 안보법제가 역내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투명하게 이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여야 지도부와의 5자 회동에선 "한미 동맹이 굳건한 상황에서 (자위대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한일 정상회담은 참여정부 이후부터 과거사 문제를 놓고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해왔다. 2005년 1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문제로 충돌을 빚었다.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역사교과서 왜곡 등에 대해 노 대통령이 문제를 삼으면서 30분의 회담 시간은 대부분 과거사 문제로 지나갔다. 2011년 12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와의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정면 충돌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1시간 정도 진행된 회담에서 사실상 발언의 대부분을 위안부 문제에 할애했고, 회담은 시종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다.다만 경제문제와 관련해서는 양국간 위축된 경제교류의 분위기를 전환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진전된 대화가 오고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이와 함께 외교가 일각에서 아베 총리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입장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지만, 청와대는 "한일 양자회담 사안이 아닌 만큼 아베 총리가 그런 입장을 표명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청와대는 이와 관련, 우리 정부는 국제규범에 따른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에 변함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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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4월29일 사상 첫 상·하원 합동연설(종합2보)(AP=연합뉴스 자료사진)존 베이너 하원의장 공식 초청장 발송…과거사 입장표명 주목 합동연설 사상 110번째…베이너 의장 "역사적 이벤트 주최 자랑스러워"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다음 달 29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상·하원에서 합동연설을 하게 됐다. 일본 총리가 미국 상·하 양원이 모두 소집된 가운데 연설을 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존 베이너 미국 하원의장은 26일 보도자료를 내고 "아베 총리에게 다음 달 29일 미국 상·하원에서 합동연설을 해달라고 초청했다"고 밝혔다. 베이너 의장은 "미국이 일본과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가운데 아베 총리가 의회를 방문하는 것을 환영한다"며 "아베 총리의 연설은 미국인들이 가장 가까운 동맹국으로부터 경제와 안보협력 확대 방안을 청취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며 "여기에는 시장개방과 자유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협력하는 방안들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베이너 의장은 이어 "아베 총리는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는 첫 번째 일본 지도자가 될 것"이라며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 이벤트를 주최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 '골든위크' 연휴에 해당하는 다음 달 26일부터 5월2일까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DC와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를 순방할 예정이라고 미국과 일본 정부가 지난 23일 동시 발표했다. 베이너 의장은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주미 일본 대사에게 공식 초청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총리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것은 54년 만이다. 지난 1954년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가 상원에서 간단한 인사말을 한데 이어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1957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가 1961년 각각 하원에서 연설을 했다. 그러나 상·하원 합동연설을 한 일본 총리는 아직 없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인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상·하원 합동연설을 추진했으나, 당시 헨리 하이드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이 데니스 헤스터트 하원 의장에게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의회 연설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전달해 무산됐다. 아베 총리는 1945년 이후 110번째로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는 외국 정상이 될 것으로 비공식 추산됐다.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아베 총리가 이번 연설에서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과거 전쟁에 대한 입장을 일정하게 표명하고 전후 일본이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해온 점을 강조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아베 총리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을 상대로 저지른 전쟁범죄와 식민지 지배 등 과거사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시민참여센터(회장 김동찬)와 워싱턴지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회장 이정실) 등 한인단체들은 지난달부터 미국 의회를 상대로 아베 일본 총리의 상·하원 합동연설을 저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여왔다. 한인단체들은 이달 중순 미국 정치전문 매체인 `더 힐'(The Hill)에 '아베 총리는 사과하라'는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고 6천 명이 넘는 한인들이 아베 총리의 의회연설에 반대하는 서명을 한 내역을 베이너 의장실에 전달한 바 있다. rh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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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美의회 합동연설로 시험대 오른 '미국의 가치'서울=연합뉴스) 미국 의회가 내달 26일 미국을 방문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상·하원 합동 연설을 사실상 수용하는 쪽으로 결론냈다고 한다. 역사상 단 한번도 일본 총리의 합동연설을 허용한 적이 없는 미 의회다. 워싱턴을 찾는 외국 정상이 미 상·하원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는 합동연설은 미국이 제공할수 있는 최고의 예우다. 그런 자리에 태평양 전쟁 도발국의 국가지도자를 세울수 없다는 것이 미 의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지난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합동연설을 시도한바 있지만 헨리 하이드 하원 외교위원장이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문제 삼아 반대 서한을 쓰면서 연설이 무산되기도 했다. 과거사 문제에 이처럼 단호한 태도를 보였던 미 의회가 역대 어느 일본 총리보다 과거사에 대해 퇴행적 인식을 갖고 있는 아베 총리의 합동연설을 허용키로 했다는 소식은 실망스럽고 충격적이다. 그것도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다음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합동연설에서 "(진주만 공습은) 치욕의 날"이라고 규정했던 그 자리에 아베 총리가 서서 전후 70년을 맞는 미일관계를 주제로 연설을 하게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후 70년을 맞아 미국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전범국이 아닌 최고 우방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볼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미 의회의 태도 변화를 일본의 돈과 인맥이 따낸 외교적 승리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그 보다는 미국의 큰 틀의 외교 안보 전략 차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본은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참여키로 했고, 반면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는 확고한 불참의사를 밝힘으로써 동북아에서 미국과 함께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게다가 변칙적인 헌법 해석으로 집단자위권 보유를 선언한 일본은 동북아 나아가 전세계에서 미국과 군사적 협업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냉혹한 국제사회의 현실에서 입의 혀처럼 노는 일본을 미국이 마다할리 없을 것이다. 더욱이 중국의 정치경제적 부상을 최일선에서 저지할 세력으로 일본만한 대항마를 찾기도 힘든게 사실이다. 그런 현실적 여건은 이해하지만, 미국이 간과해선 안 되는 것도 있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한미일 안보 동맹이 핵심축이다. 마크 리퍼트 대사가 피습후 SNS에 "함께 갑시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 역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미, 미일간 양자 동맹이 아무리 확고해도 한일 관계가 삐걱인다면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차질이 불가피하다. 한일 관계 정상화의 핵심은 과거사 문제다. 지금 정세에서 일본의 과거사 인식 변화를 끌어낼수 있는 국가는 미국뿐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일본을 설득하는 대신 한국에 대해 "과거사 문제에 집착해선 안 된다"며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면 상황은 복잡하게 꼬일수 있다. 한일 관계는 이성 보다 감성이 우선할 때가 많다. 한국 국민들은 과거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일본, 그리고 그를 후원하는 미국을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한미 동맹의 근간마저 위태로울수 있다. 미국이 세계 강국으로 등장한 한 세기 전부터, 그리고 단일 슈퍼 파워가 된 지난 20여년 동안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 자본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함께해 왔다. 미국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외교적으로 고립시킬때도 그런 도덕적 명분이 있었기에 국내외의 상당한 지지를 얻을수 있었다. 그런 미국의 가치가 아베 총리의 합동연설로 시험대에 올랐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기회가 될수 있는 법이다. 아베 총리가 연설을 하게 된다면 미 의회와의 조율은 필수적이다. 그 연설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담아 낼수 있다면 아베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은 한미일 3각 동맹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