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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매씨 가족'이 렌즈에 담은 근현대 한국의 풍경부산 일신기독병원 설립자 유품사진 9천장 발견…경기대박물관 7일부터 전시 '돌계단을 베개삼아'…포대기에 싼 네 쌍둥이.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4월 화재가 난 부산 동구 증산마을 풍경. 화재민 연락소라고 적힌 드럼통 뒤로 사람들이 몰려 있다.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2대에 걸쳐 국내에서 헌신적인 의술을 펼친 호주인 선교사 가족이 카메라에 담은 방대한 양의 우리나라 근현대 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돼 눈길을 끈다.이들은 부산을 포함해 평양, 금강산, 서울, 수원, 속초, 양양, 영천, 여수, 보은, 공주, 울릉도, 경남 등 전국 25개 도시에 의료봉사를 다니며 사진 9천여장을 남겼다. 아이 업은 엄마.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이번에 공개되는 2천여장은 수원 경기대 박물관에서 7일부터 10개월간 '호주 매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전시된다.전시 사진 중 500여점에는 한센인 환자촌, 동구 매축지, 광안리, 옛 수영비행장, 금정산성 동문, 남항과 북항 등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당시 부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동생 안은 누이.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특히 영도 봉래산, 부산 중심인 황령산, 해운대 장산, 금정산, 지금은 사라진 백산 등 산 정상에서 사방을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이 많아 과거, 현재의 모습을 대조하기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수상가옥이 즐비했던 자갈치 시장, 시장에서 담배 피우는 아낙네 등 당시 생활상도 엿볼 수 있어 지역사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1950년대 부산 장산에서 바라본 수영비행장 일대.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전시작 중 부산 사진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호주인 '매씨 가족'이 주로 부산에서 생활했기 때문이었다.사진 대부분을 찍은 이는 부산 일신기독병원 설립자인 호주인 매혜란(2009년 사망), 매혜영(2005년 사망) 자매다. 아이와 엄마.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자매의 아버지는 1910년 부산에 선교사로 와서 한센병 환자 병원인 '상애원'을 운영한 매켄지(1956년 사망)씨다.한국식 이름인 '매견시'로 개명한 매켄지 씨는 부산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던 부인 '매리 켈리'를 만나 결혼해 두 딸을 낳고 호주 이름과 함께 한국식 이름을 지었다.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낸 매 자매는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호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각각 의사와 간호사가 돼 6·25전쟁통에 피란민으로 가득 찬 부산으로 되돌아왔다.30여년간 한센병 환자를 돌본 아버지와 한센병 환자 자녀와 고아를 가르친 어머니를 보고 자란 자매는 가장 먼저 부산 동구 좌천동에 일신기독병원을 세웠다. 1950년대 부산자갈치시장의 수상가옥.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자매는 전쟁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며 이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며 의료봉사활동을 다녔다.자매는 전국 곳곳을 다니며 어려운 환경에서 가족을 돌보는 억센 한국 여성과 삶의 희망인 아이들을 낮고 따뜻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았다.1976년과 1978년 각각 호주로 돌아가기 전까지 자매는 항상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고, 어려운 이웃을 먼저 치료해달라며 돈을 모아 일신기독병원에 전달한 '부산 사람'이었다. 우리 정부는 이런 공로를 인정해 작고한 매혜란 여사에게 201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2010년께 호주에서 유족이 매 자매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9천장의 슬라이드 필름을 발견했다. 이 필름은 일신기독병원을 통해 경기대 박물관에 전달됐다. 1952년 2월 부산 중구 보수동책방골목 모습.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경기대 박물관은 지난 5년간 필름 수천 장을 하나씩 스캔하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이번에 전시회를 마련하게 됐다.애초 부산에서 전시회를 열려고 했지만, 장소 섭외가 여의치 않아 이뤄지지 못했다.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은 "매씨 가족의 사진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기의 생활상과 지리를 알 수 있을 만큼 학술 가치가 뛰어나다"며 "사진과 별개로 매씨 가족의 헌신적인 삶은 평생 인술을 펼친 장기려 박사에 버금갈 만하다"고 평가했다.경기대 박물관은 내년에 부산에서 전시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시장에서 담배 피우는 아낙네 행상.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1952년 9월 17일 부산일신기독병원 임시병동 개원 당시 첫 직원. 좌측부터 유경순, 매혜영, 매혜란, 방필수씨 모습. [경기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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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멋따라> '폐광의 부활'…광명동굴에서 공연보고(광명=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현장이자 산업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40년간 방치됐던 탄광이 와인레스토랑과 공연장, 각종 전시관을 갖춘 광명동굴 테마파크로 개발된 뒤 수도권의 명소로 떠올랐다.지난해 4월 유료 개장한 지 1년 반 동안 200만 명, 올해에만 120만 명 가까이 이곳을 다녀갔다. 최근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람객들이 더 늘었고, 올여름 무더위 속에 시원한 피서지로도 각광을 받았다.또 주한 프랑스문화원의 요청으로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5개월간 '라스코동굴벽화 국제순회 전시회'(4.16∼9.4)가 열린 데 이어, 양기대 시장이 '문화 민주화'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 도서와벽지 청소년 초청 사업을 확대하고 있어 올해 관람객 유치 목표 150만 명은 너끈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광명동굴이 이처럼 단기간에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은 비결은 '폐광의 부활'이라고 불릴 정도의 놀라운 변신 덕분이다.1972년 폐광 후 방치돼 새우젓 저장고로 사용되던 것을 시가 2011년 43억에 사들여 4년 동안 공연장을 만들고 화려한 조명을 갖춘 볼거리들을 설치해 동굴테마파크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 제작에 참여한 웨타워크숍이 뉴질랜드 현지에서 직접 만들어 공수한 용 조형물과 함께, 웨타워크숍이 참여하는 '국제판타지 공모전'(일명 '상상 설계전') 작품들을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또 동굴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1급수로 각종 물고기와 식물을 기르고 있고, 목이 마르면 이 물을 직접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동굴공연장에서는 시시때때로 영화상영과 뮤지컬 갈라쇼, 합창단 및 유명 연예인의 공연이 펼쳐진다. 광명동굴 공연장광명동굴 안에 200여석을 갖춘 공연장이 들어서 있다.방문객들은 천연동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화려한 와인 바와 와이너리에 놀라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와인 종류가 100여 종에 이른다는 설명을 듣고 또 한 번 놀란다. 국산 와인 100여 종을 한 곳에서 판매하는 곳은 광명동굴이 유일하다. 지난해 이곳에서 판매된 국산 와인은 3만2천850병으로, 연간 국산 와인 판매량 40만 병의 8%를 차지했고, 올해 들어서도 8월 말까지 1만8천327병의 국산 와인이 팔렸다. 관람객들은 매일 색다른 와인을 시음할 수도 있다. 광명시는 또 17개 지방자치단체들과 와인 생산 협약을 맺어 지방의 과일 농가와 와이너리의 소득 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대만 등지의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고 있다. 올들어 8월 말까지 단체로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만 2만 7천명이다. 1일 이곳을 찾은 '요우커'(遊客) 청커얼(成可兒. 23) 씨와 주오마(卓瑪. 24) 씨처럼 개별적으로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 수는 집계되지 않는다. 쓰촨성에서 왔다는 두 사람에게 광명동굴을 본 소감을 묻자 "귀엽고 아름답고 춥다"며 "얇은 옷을 한 벌 갖고 오라고 미리 얘기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국에는 더 웅장한 동굴들이 많단다. 올여름 무더위에도 동굴 속은 늘 서늘했다.아쉬운 점은 없느냐는 말에 "영어나 중국어 통역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면서, 동굴 안내판의 중국어 번역에서 담장을 뜻하는 장(墻)자가 잘못됐다며 바로잡을 것을 당부했다. 동료들에게도 관광지로 권할 만 하냐고 묻자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광명동굴을 소개하는 메신저 글을 보여줬다."광명동굴 귀여워요"중국 쓰촨성에서 왔다는 두 '요오커'(遊客)가 어둠 속에서 포즈를 취했다.광명시가 전국 도서와 벽지 학교 학생들이나 소년원생 등 평소 문화 향유의 기회가 많지 않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초청 사업을 확대하고, 이를 위해 기업과 사회단체 등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치면서 광명동굴은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는 사회교육 장소로도 널리 활용될 전망이다.얼마 전 소년원에 머무는 청소년들과 함께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 광명동굴 전시회를 관람했던 시 관계자는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에 내가 놀랐다"고 말했다. 시는 더 많은 문화소외 청소년들이 광명동굴에서 더 넓고 새로운 세상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1일 광명동굴을 찾은 전남의 진도중학교 1학년 임수린 양은 "처음 보는 라스코동굴벽화가 너무 신기했고, 옛날 사람들이 저렇게 자세히 관찰해서 그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면서 "동굴도 볼 것이많았는데, 특히 폭포가 너무 아름답고 좋았다. 친구들도 너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고 말했다.학생들과 함께 온 이 학교 진로담당 홍수우 선생님은 "진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재정이 열악해 체험 기회가 많지 않고, 수도권 지역으로 체험 활동을 올 기회는 거의 없는데 광명시에서좋은 기회를 주어 교사인 나도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역시 이날 학생들을 인솔해 동굴을 관람한 강원도 태백의 황지중앙초 장성진 선생님은 "광명동굴을 직접 보게 되어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며 "광명동굴은 태백 용현동굴과 비교해 너무나 잘 꾸며져 있어 놀랐다"고 소감을 밝혔다. "광명동굴 좋아요."1일 프랑스 라스코동굴벽화 광명동굴전을 관람한 전남 진도중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광명시는 올해를 '라스코동굴벽화와 함께하는 광명동굴 방문의 해'로 정한 데 이어, 동굴이 들어선 가학산(駕鶴山) 일대에 문화클러스터를 조성한 뒤 장기적으로 인근 지역을 동굴테마파크의 명성에 걸맞은 문화산업지구로 개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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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유관순…위대한 감리교인의 생애를 들여다보다'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희망이 없습니다. 역사를 알아야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전용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은 23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KMC) 출간기념회에서 "감리교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며 역사 속 인물에 주목할 것을 역설했다.기독교대한감리회는 전 감독회장 주도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감리교인들의 삶과 업적을 정리한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KMC)을 최근 출간했다.이 책에는 '조선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가우처를 비롯해 로버트 매클레이, 헨리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의 헌신적 생애가 담겼다. 또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이준 열사와 유관순 열사, 겨레의 스승 주시경 선생과 농촌운동가 최용신 등 감리교인들의 삶과 신앙 이야기가 실렸다.전 감독회장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땅에 들어온 초대 감리교 선교사들과 그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감리교의 선진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땀 흘리고 씨를 뿌렸다"며 "이 같은 역사를 젊은 후손들에게 알려줘야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전 감독회장은 20명의 감리교인을 선정한 기준에 대해 "단순히 감리교회를 부흥하게 한 인물들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 사회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분들"이라며 이들이 근대 교육과 의료 사업, 항일운동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앞장선 인물들임을 강조했다.이 책의 집필에는 장춘식 전 배재대 교수, 염창선 호서대 교수, 김동진 헐버트기념사업회 회장, 김칠성 목원대 교수, 오영교 연세대 교수 등 교회사에 정통한 학자와 목회자 20명이 참가했다. 전 감독회장은 서문과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생애를 직접 썼다.이날 출판기념회가 열린 정동제일교회는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이다. 서재필 박사, 주시경 선생 등이 예배에 참석한 개화기의 역사적 장소이자 1920년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이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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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속 '존재감' 과시하는 일본 배우들(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최근 한국영화를 보면 일본 배우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 많이 제작된 측면도 있지만, 시대극이 아닌 영화에서도 일본 배우들은 이색적인 배역을 맡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5일 개봉하는 영화 '최악의 하루'(김종관 감독)에는 배우 이와세 료가 출연한다.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 이와세 료(왼쪽)와 한예리(오른쪽)이와세 료로서는 지난해 개봉한 '한여름의 판타지아'(장건재 감독)에 이은 두 번째 한국영화 출연이다. 3만6천명의 관객을 동원한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독립 예술영화 중에는 흥행작으로 꼽힌다. 이 영화를 본 김종관 감독이 이와세 료를 적극적으로 캐스팅했다. '최악의 하루'는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가 오늘 처음 본 남자와 현재의 남자 친구, 한때 만났던 남자를 하루 동안 잇따라 만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멜로 영화다. 이와세 료는 서울에서 '은희'를 처음 만난 일본인 소설가로 나와 서툰 영어로 '은희'와 대화를 나눈다. 온종일 한국 남자들과 피곤한 감정싸움을 한 '은희'는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와세 료에게 위안을 얻는다 이와세 료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모든 캐릭터가 다 매력적이라고 느꼈다"면서 "과장하지 않고 제 모습 있는 그대로 연기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김종관 감독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오히려 더 잘 '통하는' 관계를 묘사하려고 일부러 일본인 캐릭터를 설정했다"고 설명했다.이와세 료는 일본에서 톱배우는 아니지만, 연극과 영화, 다수의 작품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다.500만 관객 동원을 눈앞에 둔 영화 '덕혜옹주'(허진호 감독)에서도 일본인 배우가 나온다.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 역을 일본배우 토다 나호가 맡았다. 토다 나호는 허진호 감독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일본판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한 인연으로 이번 영화에도 출연했다. 덕혜옹주의 일본인 남편 '소 다케유키' 역할을 한 배우는 한국 배우 김재욱이다. 김재욱은 유창한 일본어 때문에 일본인처럼 보이지만, 어렸을 때 일본에 살아 일본인 못지않은 일본어 실력을 갖췄다.다음 달 7일 스크린에 내걸리는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에서는 일본 배우 츠루미 신고가 얼굴을 내민다.츠루미 신고는 '데스노트 - L: 새로운 시작', '히어로'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일본의 중견 배우다. 2011년에는 한국영화 '마이웨이'를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난 적이 있다. 영화 '밀정'에서 츠루미 신고 그는 '밀정'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 부장 '히가시'역을 맡아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히가시'는 '이정출'(송강호)에게 밀정이 돼 의열단의 전모를 캐도록 지시하는 인물이다. 김지운 감독은 NHK 대하사극을 통해 츠루미 신고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출연 제의를 했다. 츠루미 신고는 제작진에 "한국영화 스타일과 스태프들의 열정에 큰 관심이 있었다"면서 "김 감독의 전작들을 봤고, 굉장히 폭넓은 연출을 하는 분이라고 생각해 꼭 출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에는 일본 배우 쿠니무라 준이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곡성'은 평온한 농촌 마을에 외지인이 나타난 뒤 연이어 발생한 괴이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로, 쿠니무라 준은 외지인 역할을 맡아 극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쿠니무라 준은 당시 영화 촬영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한국영화 섭외가 또 들어온다면 다시 해보고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영화 '곡성'에 출연한 쿠니무라 준 일본 배우들이 한국영화에 흔쾌히 출연하는 것은 한국영화와 한국감독들의 높아진 위상 덕분이기도 하다. 영화계 관계자는 "양국 배우들의 스크린 교류가 보다 활발해지면 한국영화계의 위상도 더 높아지고 양국 문화 교류 전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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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요람' 배화여고 본관·과학관, 문화재 지정된다문화재청에 신청서 제출…"내년 1월 정식 등록 전망" (서울=연합뉴스) 김동규 기자 = 일제강점기 독립사상 고취와 민족계몽의 현장인 100년 역사의 배화여고 과학관과 본관이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15일 서울시와 학교법인 배화학원에 따르면 배화학원은 최근 종로구 필운대로 1길 배화여고 교내 과학관과 본관에 대한 등록문화재 신청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했다. [서울시 제공] 배화여고 본관(왼쪽)과 과학관(오른쪽)서울시 관계자는 "이미 지난해 말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현장 조사를 벌여 시 차원에서는 두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라며 "문화재청 심의를 거쳐 내년 1월까지는 정식 등록을 마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배화여고 과학관은 1915년 지은 건물이다. 당시 2층 건물로 신축해 1922년 2개 층을 증축, 현재의 지상 4층, 연면적 968㎡ 규모를 갖췄다. 본관은 1926년 신축해 1978년 중수한 지상 4층, 연면적 2천138㎡ 규모의 건물이다.서울시 문화재위원 조사 결과 두 건물은 서울의 대표적인 근대 신식 학교 건물로 손꼽을만한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식 벽돌쌓기를 적용한 건물로 근대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자료라는 평가도 받았다. 작년 시작된 두 건물의 문화재 등록 추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작년 6월 배화학원 이사회는 배화여대 기숙사 신축 등을 위해 과학관을 철거하기로 의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문과 학부모, 학생들이 반발, '100년 역사 배화과학관 지킴이'를 결성해 철거에 맞섰다.당시 동문·학생 등은 과학관이 여성 개신교 선교사인 조세핀 캠벨 여사가 지은 건물이자 1910년대 한국 건축물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라고 주장했다.학교 구성원들의 반대에 학원 측은 작년 9월 임시이사회를 열어 과학관 철거 계획을 취소하고, 방향을 바꿔 과학관과 본관의 문화재 등록을 추진했다.일제강점기 지어져 100년 넘게 자리를 지키며 민족의 수난과 해방을 함께한 두 건물은 여성 독립운동사에도 의미 있는 공간이다.이 공간에서 공부한 학생과 교사들이 일제에 맞서 활발한 국권 회복 운동을 벌였다.독립운동가 남궁억(1863∼1939) 선생은 1910∼1918년 배화학당에서 학생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지리 등을 가르쳤다. 무궁화·태극기 자수 보급, 애국가사 보급 등을 통해 애국·독립사상을 고취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차미리사(1880∼1955) 선생도 배화에서 영어·성경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함께 근대적 가치관을 심어줬다.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배화여학교 학생 다수가 차미리사 선생 등의 영향을 받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벌이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1920년 3·1 운동 1주년을 맞아 배화여학교 학생 60명 중 이수희·김경화 등 24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배화여학교도 학교 폐쇄, 교장 인가 취소 등 고초를 겪었다.1927년 배화를 졸업한 김노득은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황애덕 등과 1930∼1940년대 농촌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배화학원은 이 같은 학교 역사를 기리기 위해 교내 생활관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배화학원 관계자는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설립자 가족, 동문회, 동창 등을 상대로 배화의 역사와 관련한 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학교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리고 독립·애국 정신을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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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에 갇혀 있는 한반도…격화되는 新냉전구도[연합뉴스TV 제공]'동북아 신냉전' 한반도 통일에 장애물…"갈등완화 전략 필요"주한미군 사드 배치 문제로 한미일 대 북중러 대립 기류 형성 <※편집자 주 =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8.15 광복이 71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치열한 이념 대립과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비극을 겪었지만 우리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 상황을 극복하지못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들의 대립도 여전합니다. 일본은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이런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서 한반도 정세를 조망하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며, 여전히 아물지 않는 과거의 아픈 상처와 치유 노력을 짚어보는 기획기사를 일괄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이상현 김효정 기자 =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스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었기에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 속에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나가는 비극을 막을 수단도, 힘도 없었다. 갓 해방된 약소국의 비애였다.수백만의 사상자를 낸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분단은 굳어졌고, 미소 냉전은 더욱 격화했다. 1990년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또 다른 분단국가였던 독일은 통일됐지만, 한반도의 대립구도는 여전하다. 미소 냉전은 종식됐지만, 동북아에선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를 축으로 한 신냉전 구도가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신냉전 구도의 중심에는 분단된 한반도가 자리잡고 있다.광복 71주년인 올해 초부터 북한이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잇달아 감행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례 없이 강력한 대북제재 결의를 했고, 미국과 일본, 유럽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도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우리 정부도 북한 비핵화 없이는 남북 교류·협력도 없다는 원칙 아래에 남북관계 최후의 보루로 꼽히던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결단을 내렸다. <광복 71년> 독립운동가들의 고통 서린 서대문형무소(서울=연합뉴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제강점기에 4만여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었고 해방 이후엔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공간이다. 2016.8.14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초강력 대북제재가 반년 가까이 시행되는 동안에도 북한은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는 등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주한미군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기로 결정하자 대북제재 전선에 균열 조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한반도 사드 배치는 동북아의 전략적 균형을 파괴하는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의 노동미사일 시험발사를 규탄하기 위한 유엔 안보리 성명 채택도 중국이 '사드 반대' 문구를 같이 넣자고 주장하면서 무산됐다. 주한미군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은 중국과 미국을 축으로 한 한반도의 신냉전 구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국은 한미일 동맹 강화를 통해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중국은 이러한 미국에 대항해 '반(反) 접근 지역거부'(A2AD·Anti-Access Area Denial)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A2AD 전략은 섬과 섬을 연결하는 선 내로 미군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지역 내에 들어왔을 때 힘으로 밀어낸다는 전략이다.중국은 주한미군에 사드가 배치되면 한미일 사이의 탄도미사일 방어 협력이 강화돼 A2AD 전략에 방해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직후 강대국들의 충돌 속에 한반도의 분단이 굳어진 것처럼 최근 동북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충돌은 한반도 통일에 이롭지 않은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외교·통일 분야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광복 71년> 남북대치(판문점=연합뉴스)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우리군과 북한군 병사들이 서로를 주시하고 있다. 2016.8.14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해방공간기에 동북아에서 중국, 소련, 미국 등의 대치로 분단이 고착화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지금은 이념에 근거한 강대국의 대립 속에서 한반도가 분단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은 아니고 강대국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한반도 분단이 굳어지고, 전략적 이익을 둘러싼 대립 구조를 김정은이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 책임연구원은 "전체적으로 한반도가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장벽으로 갈라지는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미중 간 전략적 이익을 둘러싼 갈등 구조 속에서 우리의 외교적 공간이 협소해지고 있다. 우리 입장에선 미국과 손을 강하게 잡으면서, 중국과 대치할 수밖에 없는, 중국과 대결구도가 커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홍현익 세종연구소 안보전략연구실장도 "미중 관계가 남중국해 문제로 점점 첨예화되고 중일 관계도 양보할 수 없는 사안으로 정면으로 충돌하는 등 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우리도 (사드 배치 결정으로) 신냉전 구도 형성에 일부 기여했다"고 말했다.홍 실장은 "사드 배치는 한쪽 진영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몰아넣어서 한미일 3각 군사동맹 형성에 기여했고 한미동맹의 반중국동맹으로의 기능변경에 우리가 끌려간 것"이라고 지적했다.우리 정부는 동북아의 갈등 구조를 완화하고 한반도 통일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전략적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장 책임연구원은 "북한은 동북아의 갈등 구조를 이용해 핵무장을 비롯한 전략적 목표 달성을 추진하고 있다"며 "우리는 갈등 구조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차원에서 갈등을 완화하고 협력구도를 끌어낼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 실장은 "안보는 단순히 군사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며 "대화와 협력을 통해 안보 불안을 해소하고 그러면서 방어력도 갖춰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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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 백색순교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8월 무더운 여름에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오르는 길은 마냥 뙤약볕만은 아니었다.좌우에는 숲이 우거져있었고, 오르막 그늘에 세워져있는 순교자 기념비가 우리에게 숭고함과 경건함을 선물해 주는 듯했다.기념관 앞에 있는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안내판과 십자가를 보며, 침묵으로 순교자들을 기리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국내,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든 순교자분들을 위한 기념관으로, 1983년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경기도 용인 소재 10만 평의 땅을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재단에 기증함으로써 세워지게 되어 1989년 11월에 개관하였다.역사화 40여 점이 전시된 1층을 시작으로 1930년대 이전 개화기의 한국 교회와 사회상을 담은 사진 120점이 전시되어 있는 2층, 순교자들의 존영과 유품이 전시돼 있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 한국교회를 위해 순교하신 545명의 순교자들의 이름 우리나라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숨진 순교자들은 2600명 정도이지만, 대부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수는 북한에서 순교하셨기 때문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으며, 이곳에는 545명의 순교자분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다. 모든 순교자들 중 시대의 흐름에 따른 6분의 순교자들은 우리의 믿음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왼쪽부터 토마스 목사, 백홍준 장로, 주기철 목사 토마스 목사는 1840년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런던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1864년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부임하였다. 중국에서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그는 조선 선교의 꿈을 지니게 되어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내한하였으나, 9월 3일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하였다. 백홍준 장로는 1848년 평북 의주 출생으로, 1876년 중국 만주에서 로스 목사를 만나 한국인 최초로 세례교인이 되었고, 그의 성경 번역을 도와 최초의 한글 성경이 출간되는데 기여했다. 1887년 조선인 최초의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사교를 전한다는 죄목으로 구금되어 2년간의 옥중생활 끝에 1893년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경남 웅천 출생으로, 오산학교와 연희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부산과 마산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부터 신사참배 반대를 주도했으며,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끝까지 투쟁했다. 그는 결국 7년여의 옥고 끝에 1944년 4월 21일 순교했다. ▲ 왼쪽부터 신석구 목사, 문준경 전도사, 손양원목사 신석구 목사는 1875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감리교 목사로 서울 수표교교회를 시무하면서 33인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일제 말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교단이 굴복하자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목회했다. 해방 이후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산정권에 저항하다가 체포, 구금되었다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1950년 10월 10일 총살을 당해 순교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2월 전남 신안 출생으로, 증도의 믿음의 어머니로 불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59세의 일기로 해남에서 패퇴하던 북한군에 의해 순교하기 전까지 18년 동안 증도를 비롯한 전남 신안군 일대 도서지역을 고무신을 신은 발로 누비며 100여 곳의 교회를 세웠고, 이를 통해 많은 교계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손양원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 출생으로, 첫 목회 지인 여수 나환자 마을의 애양원 교회에서 평생을 시무하며 환자들을 지성으로 보살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간 옥고도 치렀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때 두 아들이 피살되었으나, 그는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자신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총살을 당해 순교하였다. 모든 순교자들을 비롯하여 시대별로 순교하신 6분의 순교자들은 모진 수모를 겪음에도 믿음을 지켜 적색 순교 시대를 지나 오늘날 백색 순교의 시대를 열어주셨다.그들의 신앙과 헌신과, 결단과, 순교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피를 세운 한국교회를 든든하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유품을 돌아보고 있는 정한조 목사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담당 정한조 목사는 ‘성경을 읽다 보면 예기치 않은 구절에서 말씀에 은혜가 될 때가 있다. 이곳을 찬찬히 둘러보다 보면 어느 순교자의 삶이라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우리에게 들게 하시면 그분이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라면서 ‘여기 있는 순교자들은 적색 순교를 하신 분들이시다. 적색 순교는 악한 시대에 악한 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일어나는 순교이고, 오늘날에도 순교의 시대가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백색 순교의 시대이다.’ (백색 순교는 과거 악한 시대와 같이 믿는다고 하여 피를 흘리는 핍박을 받지 않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삶 속에서 오는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12장 1절~2절에 있는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백색 순교자들이고,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이 들 때 이곳에 찾아와서 한번 둘러보게 된다면 신앙에 큰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된다.’라고 말씀하셨다.▲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고난의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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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아수라'·'밀정' 토론토국제영화제 간다(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한국영화 3편이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27일 영화계에 따르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감성수 감독의 '아수라', 김지운 감독의 '밀정' 등 3편이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공식 초청됐다.오는 9월 8∼18일 열리는 토론토국제영화제는 북미 최대 규모의 영화제이자 칸·베를린·베니스 국제영화제와 함께 '세계 4대 국제영화제'로 꼽히는 권위 있는 행사다.다른 영화제와 달리 경쟁 부문이 없지만,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대거 참가해 하반기 북미 배급에 영향을 미치는 행사로 알려졌다.한국 작품이 초청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섹션은 유명 감독이나 배우들의 신작을 소개하는 부문으로,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들을 선정한다. 앞서 한국영화 중에서는 2009년 봉준호 감독의 '마더', 2010년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2011년 허종호 감독의 '카운트 다운'이 이 부문에 초청된 바 있다.토론토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지오바나 풀비는 '아가씨' 초청 이유에 대해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베스트셀러 '핑거스미스'를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옮겨와 에로티시즘이 담긴 스릴러이자 시대극으로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고 설명했다. '아수라'는 "숨 막히는 스케일과 정교하게 짜인 캐릭터들의 균형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웰메이드 엔터테인먼트 무비", '밀정'은 "우아하면서도 재미가 넘치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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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아픔 마주한 '소록도 특별재판' 수술 강제성 놓고 공방(종합2보)소록도에서 열린 특별 재판(고흥=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20일 오전 전남 고흥군 소록도병원 별관 소회의실에서 한센인들의 단종·낙태 피해 실상을 현장에서 직접 듣는 특별 재판이 열리고 있다. 피해 한센인 500여명은 2011년부터 국가를 상대로 1인당 5천만원을 배상하라는 5건의 소송을 제기해 1·2심에서 단종피해 3천만원, 낙태피해 4천만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현재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2016.6.20 hs@yna.co.kr'정관절제·낙태 한센인' 국가상대 소송…정부 "강제 아니었다" (고흥=연합뉴스) 방현덕 기자 = "기계를 넣어서 (낙태 수술을) 했어요. 마취를 안 했으니 그렇게 아팠겠죠. 하혈을 많이 했는데, 약을 주거나 어떻게 하란 것도 없이 그저 그게 끝이었습니다."(한센인 원고 A씨) "저도 정관절제 수술을 집도했지만 모두 환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안 해서 소록도 밖으로 내몰렸으면 사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잣대로만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20일 전라남도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 별관 2층. 법정으로 꾸며진 소회의실을 한센인 80여 명이 빼곡히 채웠다. 별관은 과거 한센인 정관절제·낙태 수술이 이뤄진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수십년이 지나 바로 이 곳에서 수술 피해 한센인들의 국가 상대 소송 특별 재판이 열렸다. 한센인 139명의 국가소송 2심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30부(강영수 부장판사)는 이날 소록도병원에서 특별 기일을 열고 한센인들 수술의 강제성 등에 대한 양측 주장을 심리했다. 한센인들은 2011년부터 5건의 국가 소송을 냈지만 법원이 직접 사건의 배경인 소록도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록도의 아픔…현장 재판' (고흥=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20일 오전 전남 고흥군 소록도병원 별관 소회의실에 마련된 한센인 단종·낙태 피해 현장 법정 변호사석에 소록도병원 80년사를 기록한 책이 놓여 있다. 피해 한센인 500여명은 2011년부터 국가를 상대로 1인당 5천만원을 배상하라는 5건의 소송을 제기해 1·2심에서 단종피해 3천만원, 낙태피해 4천만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현재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2016.6.20 hs@yna.co.kr한센인 측 박영립 변호사는 "국가는 해방 이후에도 한센인 강제 격리수용, 단종·낙태, 학살 등 수많은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며 "법적 구제를 통해 한센인들의 사무친 한을 치유하고 불법행위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측 박종명 변호사는 "낙태·정관 수술은 강제가 아니었고 불법행위를 했다고 지목된 당사자도 한센인을 평생 돌본 의료진들"이라며 "한센인의 아픔엔 공감하지만 이에 대한 위로는 특별법에 따른 보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증인으로 출석한 70대 한센인 원고 A씨는 자신이 23세이던 1960년대 소록도에서 당한 낙태 경험을 진술하며 "당시엔 소록도에서 살기 위해선 낙태 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반면에 1970∼1980년대 소록도에서 일했던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은 "소록도는 당시 한센인의 아이를 키울 물적·제도적 여건이 전혀 안 됐다"며 "국가가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은 문제"라고 증언했다.소록도에서 70여년 간 산 한센인 원고 남모(88)씨는 재판을 모두 지켜본 뒤 "나도 재판부에 한 마디 증언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답답하고 아쉬웠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날 심리 내용을 바탕으로 7월25일 오전 10시 마지막 재판을 열 계획이다. 국내에서 한센인 단종·낙태가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잘못된 믿음이 낳은 정책이었다. 소록도에서는 1936년 부부 동거의 조건으로 단종수술을 내걸었다. 인천, 익산, 칠곡, 안동 등지에서도 많은 한센인이 천부적 권리를 잃고 뱃속 아이를 떠나보냈다.피해 한센인 500여명은 국가가 수술을 강제했다며 2011년부터 1인당 5천만원을 배상하라는 5건의 국가 소송을 제기했고 그간 법원은 단종 피해자에 3천만원, 낙태 피해자에 4천만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정부는 수술의 강제성을 부인하며 항소를 이어가는 중이다. 5건 소송 중 아직 확정 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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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성공시대> ① 강광문 서울대 로스쿨 교수베이징대·도쿄대서 학위받고 2011년 서울대 교수 임용된 '빈농의 아들'"조선족 3세, 한민족 DNA·중국인 기질 겸비…각계에서 눈부신 성취""한국, 제국의 경험 없다…조선족과 공존은 다문화·글로벌국가 디딤돌" <※ 편집자 주 =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4월 말 기준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이 가운데 중국동포(조선족)는 63만 명을 헤아립니다. 귀화자 7만여 명과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7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모국을 찾아온 조선족의 숫자가 늘어나고 세대가 교체되면서 단순노무직에 머물던 이들의 직업도 학계·금융계·무역업계·문화예술계·법조계·공직자 등으로 다변화·전문화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어려운 여건과 차별적 시선을 딛고 자신의 분야에서 값진 성취를 이룬 인물을 매주 한 명씩 소개함으로써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고 다문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고자 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울대 법학관 연구실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한 강광문 교수. 2016.6.20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중국 베이징(北京)대 졸업, 일본 도쿄(東京)대 박사, 한국 서울대 교수. 동양 3국의 명문대를 거친 수재 중의 수재다.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강광문(42) 부교수의 이력을 보면 대부분 그가 줄곧 성공가도만 달려왔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질투 섞인 선망의 시선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중국 지린(吉林)성의 소도시에서 빈농의 아들로 자란 조선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가 겪었을 신산한 역경을 떠올리며 경외심을 품게 된다. 1993년 지린성 중부의 작은 도시 메이허커우(梅河口)에서는 경사가 났다. 그곳의 조선족 학생이 지린성 대입 시험에서 문과 수석을 차지한 것이다. 창춘(長春)이나 지린처럼 대도시도 아니고, 옌지(延吉)처럼 조선족이 많은 곳도 아니어서 놀라움은 더했다.그 주인공이 바로 강 교수다. 강 교수의 할아버지는 경북 안동, 할머니는 경북 영천에서 각각 만주로 이주해 그곳에서 짝을 이뤘다. 먹고살기 힘들어 지린성과 랴오닝(遼寧)성을 옮겨 다니며 번번이 새로 땅을 갈았다고 한다. 끝없는 유랑 속에 자식 8남매는 모두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농사를 지으며 3남매를 키웠다. 아버지는 농번기가 끝나면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자녀의 학비를 모았다. 강 교수의 남동생도 명문 칭화(淸華)대를 나와 베이징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누나 역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다. 17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법학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겸손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이력과 조선족으로서의 한국 생활을 털어놓았다. "제가 특별히 머리가 좋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남보다 엄청나게 노력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이 좋았습니다. 주로 철학이나 역사 쪽이었죠. 지금도 남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저 공부가 좋아서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베이징대 국제정치학과에서는 한 반의 30명 중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다. 고향의 조선족학교에서는 느끼지 못하던 콤플렉스를 경험했고 정체성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정파(政法)대 석사과정을 다니며 변호사 자격증과 법학석사 학위를 땄다. 졸업 직전부터 1년 반가량 로펌에서 일했다.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던 중 친구가 일본 유학을 권했다. 그에게는 새로운 무대였다. 2000년 12월 도쿄대 법학정치학연구과에 외국인 연구생으로 입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환경도 다르고 말도 익숙지 않았으니까요. 변호사 시절 모은 돈을 갖고 갔는데, 당시에는 두 나라의 임금이나 물가 차이가 워낙 커 금세 바닥이 났지요.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통번역 일을 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습니다."자연히 수학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쿄대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다시 딴 데 이어 마침내 2010년 박사모를 쓸 수 있었다.그의 전공은 헌법학. 그중에서도 헌법사와 법철학에 관심이 많다. 박사 논문은 일본과 독일의 헌법을 비교 연구한 것이다.도쿄대에서 연구원으로 박사후과정을 보내던 중 서울대에서 제의가 왔다. 중국과 일본의 법률을 함께 강의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선배의 권유에 따라 지원서를 냈고 2011년 초 조교수로 임용됐다. 서울대에서는 2009년 임용된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나노융합학과의 박원철(45) 교수에 이어 두 번째이고 인문사회계에선 처음이다. "제가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선조의 고향이라 친근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지요. 중국과 일본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제가 한국에서 교수로 일한다면 시야가 넓어지고 기회도 많아질 것으로 기대했지요. 이번 학기에는 일본법과 헌법사상사를 강의했습니다. 보통은 한국어로 강의하고 중국법과 일본법은 각각 중국어와 일본어로 가르칩니다."강 교수는 전형적이면서 대표적인 조선족 3세다. 1세는 일제강점기 때 건너간 조선인이고, 2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태어난 조선족 중국인이다. 3세는 문화대혁명(1966∼1969)을 겪지 않은 이른바 '70후(後)' 이후 세대로 개혁 개방의 물결과 함께 자라 이념의 틀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국제 감각도 지녔다.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우리나라로 쏟아져 들어온 조선족은 대부분 2세였다. 남자들은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단순 노무자로, 여자들은 식당 종업원·가사도우미·간병인 등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국내 조선족 사회에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고학력 엘리트들이 늘어나 전문직에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강 교수는 그 변화의 중심에 있다.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KCN)에 관여하며 계간지 '맥(脈)'의 발행을 돕는가 하면, 2011년에는 예동근 부경대 교수 등 국내 거주 조선족 3세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족 3세들의 서울 이야기'(백산서당)를 함께 펴내기도 했다. 오는 8월에도 이들과 공동으로 (가칭)'동북아의 허브를 만나다-글로벌 조선족:경계를 넘어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모국의 동포들은 여전히 우리를 정형화된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건 대부분 2세에 의해 틀지어진 것이지요. 3세들은 이중언어와 다문화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각계에서 눈부신 성취를 거두고 있습니다. 특히 관광업이나 화장품 판매 등의 분야에서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요. 지금도 북한을 대상으로 사업하는 조선족이 적지 않지만 남북 교류의 물꼬가 트이면 조선족 3세들이 시장을 선점할 것이라고 봅니다."강 교수는 한국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먼저 배워 중국보다 앞서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중국의 성장 속도가 빨라 여러 분야에서 역전 현상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특히 조선족 3세들은 한민족의 DNA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중국인 기질이 더해져 사업이나 장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는 것이다.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조선족을 멸시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려고 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최근에는 반다문화 정서가 고개를 들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한국은 제국의 경험이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1105년 고려가 탐라국(제주도)을 복속시킨 것 정도가 있을 뿐이지요. 일본은 지난 세기 다른 나라를 침략해 이민족을 다스려본 적이 있습니다. 중국은 수천 년 동안 이민족에게 공격받고 이들을 지배하며 제국을 경영해왔지요. 한국은 단일민족이란 이름 아래 균일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질적인 집단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모르고 사회 시스템의 탄력성이 약합니다." 그는 외국인 범죄가 일어날 때 집단 전체를 겨냥해 반감을 드러내거나 비난을 퍼부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범죄는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집단 간의 갈등으로 번져 수습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흔히 '조선족 사투리'로 연상되는 '보이스피싱'도 조선족에게만 화살을 겨눌 것이 아니라 허술한 금융 시스템을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범죄 집단을 두둔하거나 피해자들의 슬픔을 도외시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한국은 같은 핏줄인 조선족과 어울려 사는 법을 익히면서 다문화 사회로 순조롭게 이행하고 글로벌 국가로 도약해야 합니다. 한국인은 중국, 미국 등 강대국에 대한 사대의식을 지닌 적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이 한국으로 몰려오니 이들을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탈북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탈북자도 포용하지 못하는데 통일 이후 어떻게 남북이 어울려 살 수 있겠습니까. 조선족은 한국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한국이 아시아의 모범 국가가 되려면 자기보다 못산다고, 생김새가 다르다고, 우리말을 못한다고 무시하는 태도를 하루빨리 버려야 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강광문 교수는 "한국이 다문화 사회, 글로벌 국가로 나아가려면 먼저 같은 핏줄인 조선족과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충고한다. 2016.6.20강 교수는 같은 조선족에게도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관행과 질서를 존중하고 공존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지금은 돈 벌기 바빠 여유가 없다며 시민의식을 등한시하면 여전히 주변인으로 남게 됩니다. 또 각자 실력을 키우고 어떤 일을 하든지 성실한 태도로 임해야 주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지요." 강 교수는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마다 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중언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엄청난 자산입니다. 저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다 구사하지만 일본어에는 익숙지 못합니다. 어릴 때 자라면서 익힌 모국어와 철들고 난 뒤 배운 외국어는 다르거든요. 또 양국의 문화와 관습에 익숙한 것도 큰 장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에게 '지금은 한민족이면서도 중국인인 경계인의 처지를 불우하게 여길지 모르나 나이 들어 보면 내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늘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