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인터뷰> '반크 독도 캠프' 산파역 경북도 이소리 연구원"젊은이와 함께할 때 가장 뿌듯…국제정세 알아야 대응" (울릉=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이소리 경상북도 독도정책관실 선임연구원이 3∼5일 울릉도와 독도에서 열린 반크의 '독도 탐방 캠프'에 동행해 연합뉴스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2016. 8. 5 (울릉=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반크 청년들과 함께 독도를 찾은 게 9번째입니다. 젊은 친구들과 모든 일정을 맞추려다 보니 힘에 부치는데도 마음만은 뿌듯합니다."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와 경상북도가 2009년부터 매년 여름에 개최하는 '독도 탐방 캠프'가 올해도 3∼5일 울릉도와 독도에서 열렸다. 첫해 두 차례 열린 것을 감안하면 이번이 9회째. 4일 독도를 방문한 데 이어 5일 오전 독도 비전 선포식과 함께 공식 일정을 마무리했다. 반크의 우수 청소년 회원 49명과 동행한 이소리(53) 경상북도 독도정책관실 선임연구원은 독도를 방문한 횟수가 40여 차례를 헤아리는데, 그 가운데 반크 청소년들과 함께 올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 행사가 출범할 수 있도록 기획한 산파역이자 해마다 진행과 해설을 도맡아 지금까지 키워온 보모역이나 다름없다. 다른 독도 관련 행사는 가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빠질 때도 있는데, 이 행사만큼은 꼭 자신이 챙긴다. "박기태 단장을 비롯한 반크 스태프들은 자주 보는 얼굴인데도 만날 때마다 새롭고 반갑습니다. 반크 회원들은 해마다 바뀌는데도 늘 정겹고 든든하지요. 이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일본 시마네(島根)현이 2005년 3월 16일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표현)의 날' 조례를 제정하자 경상북도는 그날 즉각 그때까지 맺고 있던 자매결연 협정을 파기하고 '독도지킴이팀'을 설치해 4명을 배치했다. 2008년 일본 정부가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도록 하는 지침을 만들자 독도수호대책본부(10명)로 부서를 확대했다가 독도정책과를 거쳐 2014년 2월 동해안발전본부 소속 독도정책관실(12명)로 개편했다.독도정책관실은 2006년 10월 독도 거주 민간인 지원 조례 제정을 주도한 데 이어 2009년 독도재단을 설립하고 2010년에는 독도 명예주민증제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이밖에도 독도음악제, 문예작품 공모전, 독도사랑축제 등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내외국인들의 독도 탐방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부산 태생의 이 연구원은 부산외대 일어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일본 후쿠오카(福崗)의 구루메(久留米)대에서 '일본의 식민지교육'으로 박사과정을 마친 뒤 연구원 생활을 하다가 2005년 9월 경북 독도지킴이팀에 합류했다. '독도 올바르게 알기', '독도 주민 생활사' 등을 집필했으며 '사이버 독도' 홈페이지(http://www.dokdo.go.kr)에 올라가는 공보자료는 거의 그의 손을 거친다. 독도 탐방 행사에 동행하는 것은 최근 들어 한 해 서너 차례로 줄어들었다. 이번 캠프 직전에도 '전국 역사·지리 교사 독도 포럼'에 함께했다가 3일 교사들을 떠나보내고 곧바로 울릉도에서 반크 팀에 합류했다. "경북이 독도를 지키고 알리느라 힘쓴다 해도 지방자치단체로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도움을 얻을 것도 있지만 민간단체와의 협력이 더 중요하지요. 민간단체 가운데서는 반크의 활동 실적이 뛰어나고 청소년·청년단체로서의 순수성도 돋보여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사이버 독도사관학교 사이트 개설과 독도 탐방 캠프를 제안해 지금까지 함께해오고 있습니다."그가 독도 문제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지 꼬박 10년 11개월. 어느 때고 바람 잘 날이 없었지만 최근 독도를 둘러싼 파고가 심상치 않아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한 이래 일본이 한일 역사 문제에 관해 과거로 회귀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데다 중국은 남중국해 섬의 영유권을 두고 강경한 움직임을 보여 동아시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사드 배치를 놓고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의 대립이 격화되다 보니 독도 문제에 관해 국제적인 협력을 얻어내기도 힘든 국면으로 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근 들어 우리를 둘러싼 주변 국제정세가 100여 년 전 구한말 상황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때보다 우리의 국력이 훨씬 커지긴 했지만 분단 상황이어서 강대국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처지지요. 독도 문제도 강대국의 입김에 좌우되거나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을지 우려스럽습니다."그래도 그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해마다 독도를 방문하는 반크의 우수 회원을 비롯해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우리 선조들과는 달리 국제적인 안목과 탄탄한 실력을 갖춰나가고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캠프 첫날 독도 캠프에 참가한 반크 회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에 나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늘 당부해온 말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목소리가 간절하게 들렸다. "독도 문제에 슬기롭게 대응하려면 우선 일본의 전략을 잘 알아야 합니다. 배울 점은 배워야 하고요. 우리의 현실도 냉철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감정만 앞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세계의 시각을 잘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독도 문제는 한일관계에 그치는 일이 아니거든요. 종적으로는 역사를 제대로 알고, 횡적으로는 주변 상황을 두루 꿰고 있어야 예전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지 않습니다."3일간의 공식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는 5일 아침, 반크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이 연구원의 표정은 이틀 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독도 홍보 퍼포먼스 경연, 글로벌 사이트 설득 전략 발표회, 독도 방문 소감 글짓기 대회 등에서 이들의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인 듯했다.
-
반크 독도사관생도 울릉도 도착…독도 탐방캠프 일정 개시'디지털 독도 외교대사' 등 60명 참가…5일 '비전 선포식' (울릉=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반크의 우수 청소년 회원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8월 3일 '독도 탐방 캠프'가 막을 올렸다. 첫날 일정으로 울릉도 독도박물관을 견학하기에 앞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2016. 8. 3 (울릉=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의 청소년들이 일본의 역사 왜곡 기도에 맞서 독도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릴 것을 다짐하는 '2016 독도 탐방 캠프'가 3일 울릉도에서 시작됐다.반크와 경상북도가 '독도를 가슴에, 대한민국을 세계로'라는 슬로건 아래 2009년부터 해마다 개최해온 독도 캠프는 '사이버 독도사관학교'로도 불린다. 엄선된 우수 회원들을 참여시켜 독도의 현실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함으로써 최정예 독도 홍보 요원으로 양성하기 때문이다.올해 주제는 '독도에서 통일까지! 완전한 대한민국을 향하여'로 정했다. '디지털 독도 외교대사' 우수 활동자 20명, '글로벌 독도 홍보대사' 우수 활동자와 독도 SNS 홍보 우수 활동자 28명, 반크 청년리더 5명 등 60명이 초청됐으며 중국인 자원활동가 1명도 동참했다. 박기태 단장은 "최근 일본은 방위백서에 12년째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을 싣는 등 갈수록 독도 영유권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서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청년 일꾼을 길러내기 위해 독도 캠프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참가자들은 이날 아침 포항에 집결, 선플라워호를 타고 동해를 가로질러 오후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했다. 첫 일정으로 독도박물관을 견학하며 독도의 역사와 자연환경 등에 관해 배웠다.이종학 초대 관장이 평생 모은 자료를 토대로 1997년 문을 연 독도박물관은 우리나라 유일의 영토박물관. 지난해 11월 20억 원을 들여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고 지난 1일 재개관한 뒤 반크 회원들을 맞았다. 저녁에는 박기태 반크 단장과 이소리 경상북도 독도정책관실 연구원의 특강을 듣고 팀별로 세미나와 독도 홍보 전략발표회를 열 예정이다.이튿날에는 독도를 탐방해 다양한 사진을 촬영, SNS로 외국인 친구 등에게 독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다. 이날 저녁에는 팀별 퍼포먼스 경연대회와 함께 독도 사진전과 글짓기대회를 펼친다.마지막 날인 5일에는 '독도 사관생도 비전 선포식'을 열어 대한민국을 올바로 알릴 것을 다짐한다. 우수 활동자에 대한 시상 순서도 마련한다.반크의 디지털 독도 외교대사로 활동하며 UCC를 만들어 유튜브애 올리고 외국의 친구들에게도 보냈다는 오은솔(15·부산 브니엘국제예술중학교 3) 양은 이날 새벽 3시 전남 순천에서 아버지 승용차를 타고 출발해 포항에서 합류했다. 오 양은 "독도를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울릉도에 도착하니 비로소 독도에 발을 디딘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면서 "독도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온 친구들과 지혜를 모아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영원히 지켜나가겠다"고 포부를 펼쳐 보였다. (울릉=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울릉도 독도박물관에서 반크 회원들이 고윤정 학예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2016. 8. 3
-
"테러·난민 해결책은 세계시민교육" 각국 교육자 한목소리유네스코 아태교육원 워크숍에 26개국 교사교육자 참석 (서울=연합뉴스) 23일 열린 제1회 세계시민교육 역량강화 글로벌 워크숍의 '폭력적 극단주의 예방교육' 세션에서 참석자들이 소그룹 토의를 펼치고 있다. 2016.6.24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제1회 세계시민교육 역량강화 글로벌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는 26개국 28명의 교사교육자가 테러와 난민 등 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폭력적 극단주의의 해결책으로 세계시민교육을 제시했다.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APCEIU)은 22∼23일 서울 구로구 새말로의 교육원 EIU홀에서 개최한 '폭력적 극단주의 예방교육' 세션에서 참석자들이 한목소리로 청소년과 청년들에 대한 세계시민교육의 강화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24일 밝혔다.케냐의 제인 왕자루냐가 씨는 "케냐의 급진무장단체들은 돈을 준다는 것을 미끼로 청년들을 조직원으로 가입시키고 있다"면서 "정규 교육을 확대하고 일자리를 늘리면 이런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콜롬비아에서 온 호세 페르난도 메히야 씨는 "현재 콜롬비아는 정부와 반정부 마약조직인 팔크의 평화 협상 타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서 "세계시민교육은 지난 60년간 이어진 폭력, 보복, 미움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고 역설했다.토 스위힌 유엔평화대학교 교수, 피터 프레 드레이크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 학예사, 리디아 로프레히트 유네스코 포용·평화·지속가능발전국 선임 전문관, 켈리 심콕 '팀 패리 조너선 볼 평화재단' 과장 등도 "상호 존중과 관용 등을 담은 세계시민교육이 폭력적 극단주의의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연합뉴스) '팀 패리 조너선 볼 평화재단'의 켈리 심콕 과장이 23일 열린 제1회 세계시민교육 역량강화 글로벌 워크숍의 '폭력적 극단주의 예방교육' 세션에서 강연하고 있다. 2016.6.24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제공] APCEIU가 주최하고 교육부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후원하는 이번 워크숍은 지난 20일 개막해 7월 1일까지 이어진다.
-
<중국동포 성공시대> ① 강광문 서울대 로스쿨 교수베이징대·도쿄대서 학위받고 2011년 서울대 교수 임용된 '빈농의 아들'"조선족 3세, 한민족 DNA·중국인 기질 겸비…각계에서 눈부신 성취""한국, 제국의 경험 없다…조선족과 공존은 다문화·글로벌국가 디딤돌" <※ 편집자 주 =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4월 말 기준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이 가운데 중국동포(조선족)는 63만 명을 헤아립니다. 귀화자 7만여 명과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7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모국을 찾아온 조선족의 숫자가 늘어나고 세대가 교체되면서 단순노무직에 머물던 이들의 직업도 학계·금융계·무역업계·문화예술계·법조계·공직자 등으로 다변화·전문화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어려운 여건과 차별적 시선을 딛고 자신의 분야에서 값진 성취를 이룬 인물을 매주 한 명씩 소개함으로써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고 다문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고자 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울대 법학관 연구실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한 강광문 교수. 2016.6.20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중국 베이징(北京)대 졸업, 일본 도쿄(東京)대 박사, 한국 서울대 교수. 동양 3국의 명문대를 거친 수재 중의 수재다.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강광문(42) 부교수의 이력을 보면 대부분 그가 줄곧 성공가도만 달려왔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질투 섞인 선망의 시선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중국 지린(吉林)성의 소도시에서 빈농의 아들로 자란 조선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가 겪었을 신산한 역경을 떠올리며 경외심을 품게 된다. 1993년 지린성 중부의 작은 도시 메이허커우(梅河口)에서는 경사가 났다. 그곳의 조선족 학생이 지린성 대입 시험에서 문과 수석을 차지한 것이다. 창춘(長春)이나 지린처럼 대도시도 아니고, 옌지(延吉)처럼 조선족이 많은 곳도 아니어서 놀라움은 더했다.그 주인공이 바로 강 교수다. 강 교수의 할아버지는 경북 안동, 할머니는 경북 영천에서 각각 만주로 이주해 그곳에서 짝을 이뤘다. 먹고살기 힘들어 지린성과 랴오닝(遼寧)성을 옮겨 다니며 번번이 새로 땅을 갈았다고 한다. 끝없는 유랑 속에 자식 8남매는 모두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농사를 지으며 3남매를 키웠다. 아버지는 농번기가 끝나면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자녀의 학비를 모았다. 강 교수의 남동생도 명문 칭화(淸華)대를 나와 베이징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누나 역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다. 17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법학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겸손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이력과 조선족으로서의 한국 생활을 털어놓았다. "제가 특별히 머리가 좋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남보다 엄청나게 노력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이 좋았습니다. 주로 철학이나 역사 쪽이었죠. 지금도 남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저 공부가 좋아서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베이징대 국제정치학과에서는 한 반의 30명 중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다. 고향의 조선족학교에서는 느끼지 못하던 콤플렉스를 경험했고 정체성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정파(政法)대 석사과정을 다니며 변호사 자격증과 법학석사 학위를 땄다. 졸업 직전부터 1년 반가량 로펌에서 일했다.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던 중 친구가 일본 유학을 권했다. 그에게는 새로운 무대였다. 2000년 12월 도쿄대 법학정치학연구과에 외국인 연구생으로 입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환경도 다르고 말도 익숙지 않았으니까요. 변호사 시절 모은 돈을 갖고 갔는데, 당시에는 두 나라의 임금이나 물가 차이가 워낙 커 금세 바닥이 났지요.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통번역 일을 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습니다."자연히 수학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쿄대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다시 딴 데 이어 마침내 2010년 박사모를 쓸 수 있었다.그의 전공은 헌법학. 그중에서도 헌법사와 법철학에 관심이 많다. 박사 논문은 일본과 독일의 헌법을 비교 연구한 것이다.도쿄대에서 연구원으로 박사후과정을 보내던 중 서울대에서 제의가 왔다. 중국과 일본의 법률을 함께 강의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선배의 권유에 따라 지원서를 냈고 2011년 초 조교수로 임용됐다. 서울대에서는 2009년 임용된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나노융합학과의 박원철(45) 교수에 이어 두 번째이고 인문사회계에선 처음이다. "제가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선조의 고향이라 친근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지요. 중국과 일본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제가 한국에서 교수로 일한다면 시야가 넓어지고 기회도 많아질 것으로 기대했지요. 이번 학기에는 일본법과 헌법사상사를 강의했습니다. 보통은 한국어로 강의하고 중국법과 일본법은 각각 중국어와 일본어로 가르칩니다."강 교수는 전형적이면서 대표적인 조선족 3세다. 1세는 일제강점기 때 건너간 조선인이고, 2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태어난 조선족 중국인이다. 3세는 문화대혁명(1966∼1969)을 겪지 않은 이른바 '70후(後)' 이후 세대로 개혁 개방의 물결과 함께 자라 이념의 틀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국제 감각도 지녔다.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우리나라로 쏟아져 들어온 조선족은 대부분 2세였다. 남자들은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단순 노무자로, 여자들은 식당 종업원·가사도우미·간병인 등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국내 조선족 사회에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고학력 엘리트들이 늘어나 전문직에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강 교수는 그 변화의 중심에 있다.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KCN)에 관여하며 계간지 '맥(脈)'의 발행을 돕는가 하면, 2011년에는 예동근 부경대 교수 등 국내 거주 조선족 3세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족 3세들의 서울 이야기'(백산서당)를 함께 펴내기도 했다. 오는 8월에도 이들과 공동으로 (가칭)'동북아의 허브를 만나다-글로벌 조선족:경계를 넘어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모국의 동포들은 여전히 우리를 정형화된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건 대부분 2세에 의해 틀지어진 것이지요. 3세들은 이중언어와 다문화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각계에서 눈부신 성취를 거두고 있습니다. 특히 관광업이나 화장품 판매 등의 분야에서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요. 지금도 북한을 대상으로 사업하는 조선족이 적지 않지만 남북 교류의 물꼬가 트이면 조선족 3세들이 시장을 선점할 것이라고 봅니다."강 교수는 한국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먼저 배워 중국보다 앞서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중국의 성장 속도가 빨라 여러 분야에서 역전 현상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특히 조선족 3세들은 한민족의 DNA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중국인 기질이 더해져 사업이나 장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는 것이다.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조선족을 멸시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려고 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최근에는 반다문화 정서가 고개를 들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한국은 제국의 경험이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1105년 고려가 탐라국(제주도)을 복속시킨 것 정도가 있을 뿐이지요. 일본은 지난 세기 다른 나라를 침략해 이민족을 다스려본 적이 있습니다. 중국은 수천 년 동안 이민족에게 공격받고 이들을 지배하며 제국을 경영해왔지요. 한국은 단일민족이란 이름 아래 균일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질적인 집단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모르고 사회 시스템의 탄력성이 약합니다." 그는 외국인 범죄가 일어날 때 집단 전체를 겨냥해 반감을 드러내거나 비난을 퍼부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범죄는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집단 간의 갈등으로 번져 수습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흔히 '조선족 사투리'로 연상되는 '보이스피싱'도 조선족에게만 화살을 겨눌 것이 아니라 허술한 금융 시스템을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범죄 집단을 두둔하거나 피해자들의 슬픔을 도외시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한국은 같은 핏줄인 조선족과 어울려 사는 법을 익히면서 다문화 사회로 순조롭게 이행하고 글로벌 국가로 도약해야 합니다. 한국인은 중국, 미국 등 강대국에 대한 사대의식을 지닌 적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이 한국으로 몰려오니 이들을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탈북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탈북자도 포용하지 못하는데 통일 이후 어떻게 남북이 어울려 살 수 있겠습니까. 조선족은 한국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한국이 아시아의 모범 국가가 되려면 자기보다 못산다고, 생김새가 다르다고, 우리말을 못한다고 무시하는 태도를 하루빨리 버려야 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강광문 교수는 "한국이 다문화 사회, 글로벌 국가로 나아가려면 먼저 같은 핏줄인 조선족과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충고한다. 2016.6.20강 교수는 같은 조선족에게도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관행과 질서를 존중하고 공존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지금은 돈 벌기 바빠 여유가 없다며 시민의식을 등한시하면 여전히 주변인으로 남게 됩니다. 또 각자 실력을 키우고 어떤 일을 하든지 성실한 태도로 임해야 주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지요." 강 교수는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마다 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중언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엄청난 자산입니다. 저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다 구사하지만 일본어에는 익숙지 못합니다. 어릴 때 자라면서 익힌 모국어와 철들고 난 뒤 배운 외국어는 다르거든요. 또 양국의 문화와 관습에 익숙한 것도 큰 장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에게 '지금은 한민족이면서도 중국인인 경계인의 처지를 불우하게 여길지 모르나 나이 들어 보면 내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늘 말합니다."
-
<인터뷰> 한동만 재외동포영사 대사 "북중 국경지대 각별히 주의해야""北식당 종업원 집단귀순 이후 안전 우려 커져…접경지대 여행자제 요청"北위협·지진·테러 등 잇단 현안에 노심초사…"재외국민 보호 최우선"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운영 중단 조치,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대북 제재, 중국 내 북한식당 종업원 13명의 집단 귀순, 북한의 보복 위협…. 연초부터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자아내는 사건이 숨 가쁘게 이어지자 북중 접경지대의 긴장도 팽팽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17일 중국 선양(瀋陽)총영사관에는 우리 국민 2명의 연락이 두절됐다는 신고가 들어오기도 했다. '재외국민 보호'라는 헌법상 국가의 의무를 최일선에서 수행하는 한동만(55) 외교부 재외동포영사 대사의 심경도 바싹바싹 타들어 간다. 23일 오후 집무실에서 연합뉴스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던 도중에도 중국 북한식당 종업원의 추가 탈북 소식이 전해졌다. 한 대사는 "지난 4월 7일 북한식당 종업원의 집단 귀순 이후 북한은 10여 차례 보복 조치를 언급해 우리나라 재외동포와 여행객의 안전이 크게 우려되고 있다"면서 "지난 16일 처음으로 국내 주요 여행사 관계자들을 불러모아 안전수칙 준수를 요청하는가 하면 휴대전화 로밍 문자를 보내 여행객들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4월 13일 재외동포영사 대사로 부임한 그는 "테러, 지진 등 재외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늘어남에 따라 첨단 시스템 도입, 인력 확충, 대국민 홍보 강화 등에 앞장서고 있다"고 소개하며 내외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호소했다. 다음은 한 대사와의 일문일답. -- 현 정부 재외동포정책의 핵심 목표와 특징은 무엇인가. ▲ 정부는 재외동포 사회와 모국의 상생·호혜적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전 세계 720만 동포사회를 권역별로 나눠 북미에는 정치력 신장과 차세대 단체 육성, 일본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심 체제의 발전적 유지, 중국은 차세대 역량 강화와 국내 체류 동포의 생활 여건 개선, 러시아·CIS(독립국가연합)는 생활 기반 취약 고려인에 대한 법률 지원 및 경제 기반 강화 등 '맞춤형 동포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 부임한 지 40일을 막 넘겼다. 소감이 어떤가. ▲ 사건의 연속이어서 날짜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부임 이튿날 일본 구마모토에서 지진이 일어나 신속대응팀을 급파했다. 현지는 물론 다른 지역의 동포들에게도 우리 정부가 재외국민 보호에 적극 나선다는 믿음을 심어주자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북중 국경지대에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 -- 중국 관광객 유치에도 한몫했다고 들었다. ▲ 지난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후 관광객이 많이 줄었다. 1년에 해외로 나가는 국민이 1천900만 명인데 들어오는 외국 관광객은 1천300만 명이어서 관광 수지가 적자다. 법무부 협조를 얻어 3년간 복수비자를 내주기로 하고 이달 초 중국 중마이그룹 직원 8천 명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 비자를 받으면 다른 나라 비자를 얻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의전 관례를 무시하고 내가 직접 인천공항에 나가 영접했다. 삼계탕 파티를 펼친 뒤 리다빙 중마이그룹 총재가 "한류 관광이 최고"라고 소문을 내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 지난번에 외국에 나가 보니 휴대전화에 안전 관련 정보가 문자로 뜨더라. ▲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의 디지털 기술과 스마트폰 보급 속도 덕분이다. 지난해 10월 로밍 문자 서비스를 도입해 단계별 여행 경보, 감염병과 안전 관련 정보 등을 해외 도착 즉시 제공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부러워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개소 10년을 맞은 영사콜센터도 자랑할 만하다. 연중무휴로 하루 24시간 상담해주고 있는데 연간 26만 건의 상담 실적을 기록했다. 영어·중국어·일본어·스페인어·러시아어·프랑스어로 3자 통역도 해준다. -- 테러나 지진 등이 자주 일어나 재외동포나 여행객 등의 안전이 우려되고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의 피해도 걱정된다. ▲ 재외공관 사건·사고 담당영사 보조인력 11명을 지난해 처음 배치한 데 이어 올해 23명을 늘렸다. 여행경보 단계별 해당 국가 목록, 해당 국가 여행 시 유의사항 등의 홍보에도 주력하고 있다. 위기관리 능력을 기르기 위해 공관마다 재난대응 훈련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의 안전 의식이 높아져야 한다. 해외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목적지의 치안 상황 등을 확인해 위험 지역 방문은 자제하고, 다중 밀집 시설이나 야간 통행은 피해야 한다. 혼자 다니는 것도 위험하다. 또 가족 등에게 여행 일정과 이동 경로를 알려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영사콜센터나 현지 공관에 신속하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해 달라. -- 남북한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북중 국경지대의 긴장도 높아지고 있다. ▲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최근의 북한 정세와 관련해 지난 16일 처음으로 국내 주요 여행사와의 간담회를 개최해 북중 접경지대 여행 자제, 안전수칙 안내와 각별한 주의 등을 요청했다. 인터넷 홈페이지나 SNS 등으로도 안전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선양총영사관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3성 당국 간의 유기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언론인단체나 선교단체 등에도 신변 안전에 유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선양총영사관에 신고된 실종자는 여전히 소재 파악이 안 된다. -- 최근 필리핀에서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사망, 납치 등이 잇따르고 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 올해 3명, 지난해 11명의 우리 국민이 살해되는 등 강력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인도·일본 등 다른 나라 국민들도 많이 피해를 보고 있다. 여행객 등 방문자보다는 현지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다. 필리핀 경찰과 협력해 코리안 데스크를 늘리고 우리 경찰을 추가 파견하는 한편 CCTV 등 방범 시설을 확충하고 한인회 방범단도 운영하고 있다. 필리핀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면 여러 문제를 낳으므로 민다나오는 흑색경보(여행 금지) 및 특별여행경보(즉시 대피), 팔라완은 적색경보(철수 권고), 마닐라 등 대부분 지역은 황색경보(여행 자제), 보홀은 남색경보(여행 유의) 등 지역별로 구분해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출국해 필리핀에 입국한 뒤에는 정부가 통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지난 9일 필리핀 대선에서 당선된 로드리고 두테르테 후보는 5차례나 방한했을 만큼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치안 확립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어 우리 국민의 안전 문제가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우경화로 헤이트스피치(특정 인종이나 민족 등을 겨냥한 혐오 시위나 발언), 코리아타운 경기 침체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지난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과 양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 등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개선되고 있다. 지난 13일 헤이트스피치 금지 법안이 일본 참의원을 통과했다. 이달 중 중의원 가결을 거쳐 법제화되면 재일동포들의 시름이 많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 8월 5∼21일 브라질에서 열리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앞두고도 고민이 많겠다. ▲ 첫째 걱정은 지카바이러스, 신종플루, 황열병 등 각종 감염병의 창궐이다. 치안도 불안하고 현지 공관도 없는 형편이다. 대회를 전후해 코트라 무역관에 임시 영사사무소를 설치, 신속한 영사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의료진도 파견할 방침이다. -- 10월에 큰 행사를 치른다고 들었다. ▲ 10월 25∼27일 인천 송도에서 제3차 세계 영사 고위급회의가 열린다. 전 세계 50여 개국 영사담당 차관보 또는 국장들과 관련 국제기구·기업 인사 등이 참석해 위기관리, 이주노동자 보호, 안전여행 문화 확산 등의 의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 직업외교관으로 일하며 재외국민 보호와 관련해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 평소 외교부 관료의 입장이 아니라 국민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는 신조를 지니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근무할 때 동포들이 총영사관을 찾기가 어려워 순회영사 제도를 확대했다. 방문객이 폭주하다 보니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받았는데 노인들은 인터넷에 익숙지 않아 한두 시간 기다리기 일쑤였다. 변호사, 회계사, 교육전문가, 의사·한의사 등에게 부탁해 상담 코너를 만들었다. 민원인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한의사가 침을 놓아주는 게 가장 인기였다. 자원봉사자로 나선 각 분야 전문가들도 네트워크가 넓어져 도움이 된다고 만족해했다. '전문가와 함께하는 순회영사 서비스'로 2014년 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은 전 세계 175개 외교부 공관 가운데 '행정 개선 우수 사례' 최우수상을 받았다. 경기도 평택 태생의 한동만 대사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외무고시(19회)에 합격해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다. 알제리·영국·호주대사관을 거쳐 외교부 안보정책과장·통상홍보기획관·국제경제국장, 뉴욕 영사,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등을 역임했다. 통상외교정책 전문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글로벌 메가트렌드의 변화와 대한민국의 신성장 동력을 소개한 저서 '한국의 10년 후를 말한다'를 2011년 펴내기도 했다.
-
<인터뷰> 일본서 특강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원장일본 '코딱지'들 앞에서 한국 종이접기 매력 전파"다시 태어나도 종이접기 할 것…지금도 머리맡엔 색종이와 가위" (도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어이 코딱지들! 이제 어른 다 됐네." 색종이 하나로 어린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던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64) 씨가 일본의 '코딱지'들을 만나러 현해탄을 건넜다. 종이문화재단·세계종이접기연합(이사장 노영혜)이 동경한국학교(교장 김득영)와 함께 28∼30일 개최하는 '대한민국 종이접기 문화 축제 한마당'에 참여한 것이다. 재일동포 어린이들과 함께한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원장.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인 그는 30일 오후 축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특강에 나선다. 축제가 한창인 29일 오후 동경한국학교에서 그를 만나 근황과 함께 '오리가미'의 본고장인 일본에서 한국 종이접기를 알리게 된 소감을 물어보았다. -- 일본에서 특강을 하니 감회가 남다르겠다. ▲ 그동안 수도 없이 일본을 와봤다. 내가 아이들의 종이접기 선생님으로 나서게 된 계기도 30년 전 일본에서 유치원 수업 장면을 지켜본 것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종이접기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어린이에게 종이접기를 가르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종이접기 자료를 수집하러 일본을 들락날락했다. 서점에 들러 책이며 도구 등을 상자째로 실어와 공부하고 연구했다. 이제 한국식 종이접기를 일본에 역수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영혜 종이문화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재능 기부하러 동행한 각 지역 종이접기 원장님들에게 감사드린다. -- 특강 때 어떤 내용을 들려줄 생각인가. ▲ 특강 내용은 미리 말할 수 없다. 나도 모른다. 청중의 분위기를 보아 즉석에서 정하기 때문이다. 색종이로 함께 뭘 만드는 이벤트 형식이 될 것이다. 인문학 강의 때는 내 경험을 토대로 소통과 공감 방식에 관해 주로 이야기하곤 한다. -- 일본 오리가미와 한국 종이접기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 일본 오리가미는 '오다쿠'(御宅·한 분야에 광적으로 집중하는 마니아의 뜻을 지닌 일본어) 문화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가 돋보기 쓰고 깨알만한 종이를 핀셋으로 접는 것을 보면 존경심이 느껴지면서도 이걸 아이들에게 가르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교는 일본이 앞설지 몰라도 우리는 틀에 얽매이지 않아 훨씬 창의적이다. 내가 불과 몇 년 만에 일본 종이접기 작가들이 주는 상을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MBC TV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출연하고 나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겠다. ▲ 그전에도 인기는 많았다(웃음). 1988년부터 20여 년 동안 KBS 1TV 'TV 유치원 하나둘셋'에 출연할 때도 고속버스 휴게소에 들르면 화장실에 뛰어갔다. 나를 붙잡고 사인을 해 달라거나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 힘들었다. 식당에 앉아 음식을 입에 넣고 씹고 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면 정말 곤란하다. 그때와 지금이 달라진 건 인터넷의 댓글이다. 순식간에 반응이 쏟아진다. -- 댓글에 올라오는 최신 유행어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가. ▲ 그래도 어른 대접을 해주는지, 나에겐 유행어나 약어를 덜 쓰는 것 같다. 모르는 단어가 올라와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그게 또 소통의 비결이라고 하더라. 어른이고 아이고 모르는 건 물어봐야 한다. -- '마리텔'에서 1등을 차지할 것으로 기대했는가. ▲ 몰랐으니까 나도 눈물을 흘렸지. 스태프도 다 울고. 딸 시집 보낼 때도 안 울었는데. 그래도 오래 할 생각은 없었다. 얼마 후에 1등 출연자들을 모아 '왕중왕'전을 한다는 데 그때 한 번 더 출연할 예정이다. -- '마리텔'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하는가. ▲ 물론이다.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고 강연 부탁도 늘어났다. 행동이 훨씬 조심스러워져 불편할 때가 잦아졌다는 단점도 있다. 나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지상파TV에도 다시 고정 출연하고 있다. 10월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10분 MBC TV '똑?똑! 키즈 스쿨'에서 만날 수 있다. 과자 '고래밥' 광고에도 출연했다. 포장 상자 뒷면에 그의 얼굴과 함께 고래, 거북, 문어 등 9가지 해양생물 캐릭터를 종이로 접는 방법이 담겨 있다. -- 왜 아이들을 '코딱지'라고 부르는가. ▲ 아이 적에는 '코딱지', '방구', '엉덩이' 이런 말을 들으면 웃음을 터뜨린다. 그냥 "여기 보세요"라고 하면 절반은 딴 짓을 한다. 그런데 "어이! 코딱지들!" 하고 부르면 "저 코딱지 아니거든요"하며 쳐다본다. 자연스럽게 주목시킬 수 있다. 그때의 코딱지들이 이제는 20∼30대가 됐다. --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가. ▲ 강의와 강연이 주업이다. 마산대 아동미술학과 초빙교수를 맡아 대학생들에게 강의한다. 강연 대상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다. 학교도 가고, 백화점 문화센터도 가고, 기업도 가고, 복지시설에도 간다. 종이문화재단과 종이접기를 보급하는 일에도 매달리고 있다. 종이문화재단이 미국, 몽골, 필리핀, 뉴질랜드 등지에서 종이접기 행사를 개최하면 열 일 제치고 따라가 강연한다. 재외동포 선생님들이나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들에게 종이접기를 가르쳐 주는 게 큰 보람이다. -- 오랜 꿈이던 미술체험관을 지었다고 들었다. ▲ '아트 오뜨'라고, 종이로 꾸민 작은 미술관이다. 충남 천안에서 문을 연 지 5년 됐다. 방 4개와 야외공간을 돌아다니며 놀이를 하는 방식이다. 나를 보고 찾아오는 것이어서 예약제로만 운영한다. -- 종이접기의 장점은 무엇인가. ▲ 종이접기는 과정의 예술이다. 예쁜 빛깔의 종이를 눈으로 보고, 종이 특유의 향내를 코로 맡고, 종이를 접거나 오릴 때 소리를 귀로 듣고, 촉감도 손으로 느낀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집중력과 창의력이 길러지는 것은 덤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으니 소통과 공감에도 유용하다. -- 후회한 적은 없는가. ▲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러나 뿌듯할 때가 훨씬 많다. 지금도 머리맡에는 색종이와 가위와 풀이 있다. 언제든 생각이 떠오르면 접어본다. 머릿속에도 온통 종이접기 생각뿐이다. 다시 태어나도 종이접기를 할 것 같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야지. 시골 분교나 보육원 등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찾아 종이접기를 가르쳐주는 재능기부에 더 힘을 쏟고 싶다. 그런데 시골 학교에서 강연해주겠다고 연락하면 거절할 때가 많다. 무슨 물건을 팔려고 하는 줄 아는 것이다. 얼마나 당했으면 그럴까 싶다. 일본 특강에 나선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원장.
-
불붙은 원류 논쟁…한국 종이접기 vs 일본 오리가미(도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국내외 동포들이 힘을 모아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만들었듯이 잃어버린 종이접기 역사를 다시 찾고 새 한류 문화로 재창조해 세계화해야 합니다."28일부터 3일간 일본 동경한국학교에서 '한반도 평화통일과 세계 평화 기원 종이접기 축제 한마당'을 개최하는 노영혜 종이문화재단 이사장이 27일 일본에 도착해 동행한 지부 원장과 강사들에게 당부한 말이다.종이문화재단은 태권도(Taekwondo)가 가라테(唐手·Karate)를 누르고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대표적인 격투기 스포츠로 우뚝 선 것처럼 한국식 종이접기(Jongie Jupgi)도 일본의 '오리가미'(折紙·Origami)를 제치고 전 세계인의 문화로 뿌리내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실제로 세계종이접기연합의 각국 강사들은 태권도가 '차렷', '경례', '앞차기' 등의 우리말 구령과 명칭을 전 세계에 통용시킨 것을 본떠 외국인에게도 '삼각접기', '학접기' 등 한국식 용어로 지도하며 세계화를 꾀하고 있다. 국회에서 종이접기로 만든 고깔을 쓰고,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장면. 종이접기 세계화를 위한 퍼포먼스다. ◇ 세계적으로는 오리가미가 대세…도전장 낸 종이접기연합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미 대부분 국가에서 종이접기를 '오리가미'로 부르고 있다. 프랑스나 스페인 등 자국의 문화적 전통에 자부심이 강한 일부 나라만 예외다. 영어로는 'Paper Folding', 독일어로는 'Papierfalten'이라고 하는데 미국종이접기협회 창시자인 릴리언 오펜하이머가 제안해 오리가미가 종이접기를 일컫는 국제용어로 통용됐다고 한다.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됐지만 세계적으로는 각각 '젠'(Zen), '진셍'(Ginseng), '도후'(Tofu)라는 일본어로 불리는 '선'(禪), '인삼'(人蔘), '두부'(豆腐)와 비슷한 처지다.비단 명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종이접기의 기호도 일본의 종이접기 작가인 요시자와 아키라(吉澤 章·1911∼2005)가 사용하던 도면 표기법이 국제적인 표준이 됐으며, 미국과 유럽 등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오리가미란 이름으로 일본식 종이접기를 가르치고 있다. 종이학 1천 마리를 접어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것도 일본이 전 세계에 퍼뜨린 습속이다.일본은 2차대전 후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 등을 앞세워 기모노, 다도(茶道)와 함께 오리가미를 적극적으로 세계에 전파해온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맞서 종이접기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나선 곳이 종이문화재단이다. 노영혜 이사장은 1987년 한국 종이접기·종이문화 재창조 운동을 제창한 이래 한국종이접기협회, 종이나라박물관, 종이문화재단, 세계종이접기연합 등을 잇따라 설립하며 한국 전통 종이접기의 복원과 현대화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종이로 접은 작품들. 서울 장충동 종이문화재단 내 종이나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고구려 승려 담징이 종이제조법 일본에 전해 그러면 역사적으로 종이접기 원류는 과연 어느 나라에서 비롯됐을까. 역사학자들은 종이가 중국에서 발명돼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으므로 종이접기도 이 순서를 따라 발전되고 전파됐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스이코 천황 18년(610년) 고구려왕(영양왕)이 보낸 승려 담징이 그림에 능했고 종이와 먹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이때 종이접기도 함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삼국시대부터 무속 신앙에 쓰였던 '고깔'을 우리나라 종이접기의 원형이라고 보기도 한다. 안동 봉정사 창건 설화에 따르면 통일신라 초기 문무왕 12년(672년) 의상 대사가 영주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리고 그것이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세워 봉정사(鳳停寺)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조선 초 재상 하륜(1347∼1416)이 만들었다는 승경도놀이도 우리나라의 오랜 종이접기 전통의 증거로 꼽힌다. 막대나 주사위 모양의 윤목을 굴려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겨루는 놀이인데, 관직 이름을 적어놓은 말판을 접는 방식이 고차원의 수학적 원리를 담고 있다.◇ 오리가미의 원형도 고대 신앙 풍습에서 기원 오리가미의 원형도 고대 신앙 풍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에게 기도하며 죄나 부정을 씻는 '하라이'라는 의식에 종이로 인형을 접어 사용한 것이 시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례용 종이접기는 무로마치 시대(1336∼1573)에 발달해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그에 앞서 헤이안 시대(794∼1185) 말기 문인이자 시인인 후지와라노 기요스케가 지은 '청보조신집'(淸輔朝臣集)에 개구리 종이접기에 관한 설명이 있고, 에도 시대(1603∼1867)에는 학·배·개구리 등의 모양을 종이 한 장으로 접는 방법이 70가지나 성행했다고 한다.오리가미는 가위나 풀을 쓰지 않고 한 장의 정사각형 종이로만 접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이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노영혜 이사장은 "종이접기를 체계화하고 세계화하는 데는 일본이 앞섰지만 역사적으로는 우리나라가 먼저였을 것으로 확신한다"면서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종이접기 원조 경쟁을 펼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곤란하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실제로 몇 해 전 우리나라의 한 신문이 노 이사장의 말을 인용해 "종이접기의 종주국은 일본이 아닌 한국"이라고 보도하자 이를 본 일본 관계자들이 노 이사장에게 "근거를 대라"며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종이접기의 원류라고 알려진 고깔을 접는 장면.